우리나라 헌법 제3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으로서 권리를 누리고자 한다면 당연히 국민의 의무도 이행해야 한다. 물론 납세 의무 부과를 위한 과세 정책은 공평 과세, 정당 과세이어야 하며 또한 정부와 행정청에서는 혈세를 헛되이 쓰지 않도록 정책 입안은 물론 사전, 사후 관리에 있어 주의의무(注意義務)를 다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에게 떳떳하게 납세 의무 이행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른바 유리 지갑이었기 때문에 이런 납세에 대한 원칙적인 개념이나 본질, 상관관계를 생각할 여지도 없이 자동으로 성실 납세자가 되었다.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각종 세금이든 국민연금 같은 4대 보험이든 한 푼도 빼지 않고 꼬박꼬박 냈다. 아니 알아서 가져간 건가? 어쩌다 뉴스에 체납이나 탈세 이슈가 나오면 '아이고 간도 크지'하는 생각부터 든다. 발신인이 국세청이나 세무서인 우편물이 우편함에 꽂혀 있으면 가슴부터 철렁한다. 내가 뭘 잘 못했나? 무슨 세금을 덜 냈나?
당연히 베트남에서도 세금을 꼬박꼬박 냈다.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근로소득에 대한 개인소득세 20%에다가 건강보험(HI) 및 사회보험(SI) 근로자 부담분 10.5%를 합쳐서 약 30%를 급여에서 공제하고, 회사는 여기에 회사 부담분을 합쳐서 정기적으로 신고, 납부한다. 개략적으로 그렇다. 액수도 적지 않지만, 개인소득세를 납부하지 않으면 출국을 못할 수도 있으며 건강보험을 내지 않으면 병원에서 즉시 보험 적용이 배제된다고 한다. 실업보험(UI)은 국적자에게만 해당되어 외국인에게는 부과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도 세무서는 징수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베트남 세무서에서 나를 오라고 한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경리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베트남 직원 A가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며 노동 허가증, 거주증, 여권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세무서에 직접 출두해야 한다고 한다. 무슨?이나 왜? 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없다.
답답하더라도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최대한 듣고, 묻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어떤 일에 대해 전모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 일이 실제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의 비즈니스 프로세스 수준에 비해 합리성이나 예측 가능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해야 하고 순간 대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만약 적절하게 지휘하지 않으면 그 일은 말짱 도루묵이 되거나 이상하게 왜곡되기 십상이다. 끝으로, 혹시 결과가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정신 건강을 해치지 않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베트남에서 직원들과 소통하며 일하는 방법이다.
전년도 개인소득세 원천징수 환급분을 받으려면 개인별 소득세 코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구비서류가 필요하며, 서류 제출 후 본인 확인을 위해 직접 관할 세무서를 방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막을 파악해 본 이 건의 요지이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세무서에 가야 한다고? 베트남 세법을 살펴보니 과세 소득이 있는 개인들은 각각의 세금 코드(tax code)가 있어야 하는데 근로 소득의 경우에는 원천징수 의무자인 회사를 통해 코드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되어있다. 즉, 본인이 직접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하지만 규정은 규정일 뿐 현장에서는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한국에서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한국에서는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규정대로 될 것이라는 예측 가능성이란 게 있지만 이곳의 비즈니스 환경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다 직접 가야 한다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서류만 제출하면 되지."
옆에 서서 듣고 있던 대표가 한마디 참견한다.
"네. 가야 해요."
A를 비롯한 베트남 직원들이 일제히 반응한다. 평소에도 이와 비슷한 '일대 다(多)'의 전선이 자주 형성된다. 베트남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서 베트남의 제도와 문화적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또는 '여기는 한국이 아니거든요' 뭐 이런 거다.
다음 날 직원들에 이끌려(?)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세무서로 향했다. 이럴 때는 고집부릴 게 아니라 직접 부딪혀 봐야 명확해진다. 차에서 내렸더니 먼저 오토바이를 타고 온 A와 다른 직원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 직원들 대부분은 차멀미를 한다고 잠깐이라도 차를 타는 것을 꺼려한다.
오토바이들이 가득 차 있는 입구를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영화에서 보던 이승만 정부 시절의 관공서 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다. 색다르고 경이로웠다. 베트남 세무서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원 한 명이 서둘러서 서류를 접수하더니 기다려야 하니까 자리에 앉아 있으란다. 그렇지 기다려야겠지. 처음 휴대폰 개통할 때 머리가 지끈거리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영업 중인 모비폰(mobi phone) 대리점 찾는데 30분, 기다리는데 40분, 일 처리하는 데 20분이 걸렸으니까. 그것도 같이 간 '지혜롭고 눈치 빠른' 직원 덕분이었지 아마?
사람들 틈새에 끼어 앉아 기다렸다. 그 사이에 B는 부가세 신고 업무를 보느라 이 창구, 저 창구로 옮겨 다니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 창구인지 안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잘도 찾아다닌다.
주위를 둘러보니 일단은 업무를 보는 공무원들 뒤쪽에 있는 책장의 서류 보관 상태가 눈에 띈다. 저렇게 서류를 보관하다가는 특정 서류를 다시 찾는 일이 쉽지 않을 듯 보였다. 무엇보다 금방이라도 서류 뭉치가 쏟아져 공무원들의 뒤통수를 가격할 듯 위태로웠다.
민원인과의 사이를 가려놓은 투명 아크릴 가림막은 하단까지 비닐이 드리워져 있어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있었다. 코로나 예방 차원이겠지만 이 장애물들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면 고개를 처박고 큰소리로 얘기해야 했다. 번호표나 호출 방송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귀를 기울여 집중하다가 이름 부르면 창구로 달려가는 시스템이다. 순서가 지나가 버리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으니 모기만 한 소리로 불러도 잘 알아 들어야 한다.
창구 앞의 접이식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민원인들이 마치 경찰 조사를 받는 피의자 신분인 듯 애처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평불만 한마디 없이 고분고분하다. 공무원들의 느릿한 일 처리 속도 역시 당연하다는 듯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세무서 창구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누가, 어떤 게 옳은 거지?
시간이 꽤 지났다. 미안한 듯 직원들이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사실은 지루하기도 하고 바쁜 시간에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일부러 느긋한 척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이름 부르는 소리를 놓칠까 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른 창구에서 일을 보던 B가 그쪽 창구로 오라고 손짓하며 나를 부른다. 그쪽 공무원에게 '신속 통합 처리(?)'를 부탁한 걸까? 아니면 셉(sếp)이 한국 사람인데 성격이 급하다고 공무원을 설득했을까?
분명 이쪽 창구에 서류를 접수했고, 접수받은 공무원 앞에 쌓여있는 서류의 양으로 보아 아직 전산에 입력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다른 쪽에서 처리가 가능하지? 어쨌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창구 앞 접이식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고 B는 내 옆에 섰다. 남자 공무원이 내 얼굴을 한 번 쓱 보더니 휴대폰으로 문자 인증이 갔으니 보여달란다. 휴대폰을 보여주자, 인증 번호를 확인한 다음 키보드를 우다다다 두드려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했다. 그리고 끝.
회사로 돌아와서도 내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 두 개가 더 왔고 이를 확인해 가며 A가 뭔가 후속 업무를 처리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는 다음 날 '새벽 5시 34분'에 문자 메시지가 한 번 더 왔다. 출근해서 A에게 보여줬더니 '네'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완료되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어쨌든 이제 나는 베트남에 개인 소득세 코드가 생겼다. 근로 소득을 포함한 모든 개인 소득을 신고 납부할 의무가 생겼으며, 추후에 회사가 원천징수한 개인소득세 초과 납부 분을 환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기업에 대한 부가세 환급 같은 일의 처리 속도가 매우 느리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 본위의 사회주의 국가답게 개인소득세 환급이라든지 임대 지원금같이 노동자들에게 주는 돈은 비교적 빠르게 처리되는 것 같다. 나도 허가받은 노동자이므로 머지않아 환급금과 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거의 반나절을 날리기는 했지만, 덕분에 시간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으로 베트남 세무서라는 곳을 직접 경험했다. 하지만 꼭 갔어야 했는지, 다른 사람들도 전부 나처럼 직접 세무서에 나가야 하는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