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사업하시는 분들은 한국과는 다른, 때로는 한국보다 더 가혹한 돌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온갖 감언이설로 사람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린 다음, 상대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한다.
이미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베트남에서 사업하려면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일하다 보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접촉해 오는 개인이나 집단이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가급적 이런 의도되지 않은 모임이나 강제로 초대된 단톡방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 물론 거기서 얻는 도움도 있겠지만, 부작용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출근하자마자 계약서 하나를 주더니 '검토'해 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검토'를 하는데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대표는 내가 법학 전공자라서 너무 예민하게 보는 것 아니냐고 한다. 하지만 그냥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 수준에서 본다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A사는 B사의 경영 전반에 대해 컨설팅을 제공한다. 그 대가로 B사는 A사에 수수료를 지급한다. 구체적으로 정한 것은 상대방에 지급해야 하는 돈의 액수와 시기뿐이었다. 계약은 서로 약속된 내용을 성실히 수행하는 기준이고, 만약 분쟁이 생기면 해결의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다. 이 건은 무효를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며 일방적이었다.
상대 쪽에서 초안을 작성해서 보냈는데 말이 초안이지 수정은 불가하다고 한다. 즉, 도장을 찍거나 아니면 말라는 뜻이다. 대표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이런 울며 겨자 먹기 계약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아니면 진짜 그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건가?
납품을 받지 못하고 중국 공장에 묶인 원자재 대금 회수를 위해 대표는 지금까지 해볼 만한 것은 다 해보았다. 중국 공안, 베트남 공안에 고소한 것은 물론, 00 법무법인에 의뢰해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심지어는 중국 마*아까지 줄을 대보았다고 한다.
별별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답답해하던 대표에게 그럼 내가 도와줘? 하면서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주선한 사람이 바로 하노이 X이다. 하노이 X는 우리 회사 직원들이 그를 부르는 별명이다.
땀을 많이 흘리는 그는 항상 셔츠의 절반이 흥건히 젖어 있다. 골격과 두상이 크고 짧은 머리 스타일이다. 걸음걸이는 거의 뛰는 속도이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하다. 사교성이 좋아 사람을 만나면 과장된 몸짓으로 허그를 하며 반가워한다. 어쩌면 저렇게 모든 사람이 절친인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대표와는 오래전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그가 가끔 우리 회사 사무실에 나타나면 직원들은 큰소리로 인사를 해야 한다. 만약 안 그러면 한바탕 난리가 난다. 이 회사는 직원 교육이 안 되어 있느니, 직원들이 예의가 없느니, 사장실에 가서 항의한다. 직원들 인사를 받지 못해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하나 보다. 훗 날 하노이 출장을 가게 되면 일부러 그의 회사에 들러 보아야겠다. 직원들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한 번은 회사 입구에서 경비가 체온 측정을 해야 한다고 체온계를 그에게 들이댄 일이 있었다. 그러자 "나야 나, 내가 누군지 몰라?"라고 소리 지르며 막무가내로 들어와서는 경비를 자르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 사태는 내가 출입하는 모든 사람의 체온을 철저히 체크하라고 지시했다고, 경비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해명하고 나서야 겨우 무마되었다. 특권 의식 쩐다.
그런데 정작 직원들이 가장 질색하는 것은 따로 있다. 고아원을 비롯한 관계 기관에 기부나 선물을 해야 한다면서 회사 물건을 수시로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 회사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고아원 아이들이나 공안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는 하는데, 그 기부자 명의는 본인이었을 거라고 직원들은 추측했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표는 그의 인맥을 이용할 때가 있을 거라며 반출 전표에 사인을 해주곤 했다. 물론 나도 이 흐름을 거부할 수 없어 그 전표에 사인하기는 했다. 굳이 이런 문제로 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
하노이 X는 전에 여행사 관광 가이드로 일하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에는 7~8%에 달하는 베트남 예금 금리 덕분에 생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은 베트남 정관계 고위직을 알고 있고, 몇몇 기업 수장들과 친분이 있어, 누가 베트남에서 일이 안 풀릴 경우 이 인맥을 활용하여 해결해 줄 수 있다고 광고하고 다닌다.
얼마 전에 특별한 목적이 없는데도 뜬금없이 대표가 하노이 출장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런데 공항에 내려보니 하노이 X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내가 반대할 것이 뻔하니까 스케줄을 미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주려는 듯, 하노이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 주었다. 주로 일반적으로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골든레이크 호텔 골든 룸이나 동손 드럼 레스토랑 유물관 같은 곳이었다. 이용하면서 보여준 것이 아니라 구경만 시켜주었는데, 매니저들이 달려 나와서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짐작건대 그때 대표하고 이 계약에 관한 합의가 있었고 소위 컨설팅 당사자인 스**라는 사람을 소개받기로 한 모양이다. 나는 내용을 알지 못하였고 동의한 적도 없었지만, 하노이 출장에 동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에는 암묵적 동조자로 간주하는 듯했다.
결과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컨설팅 수수료를 선불로 주고, 받을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 스**라는 사람이 베트남 공안 고위층에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는 전화를 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물론 이후에도 공안에서 신속한 수사를 진행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노이 X는 회사의 최근 이슈인 대형 유통 업체 입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윗선에 청탁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며 몇몇 건에 개입하기는 했지만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가져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와는 별도로 내가 직원들과 함께 '원칙적으로' 추진한 건들의 성과가 좋았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먹여 주기까지 해야 하느냐. 나는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남의 탓을 했다.
다행히도 코로나 봉쇄 해제 이후 새로 시작한 하노이 X의 커피 프랜차이즈 사업이 잘 돼가고 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사업이었고, 커피 원두를 싼 가격에 한국에 수출하는 것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드디어 그 막강한 인맥이 결실을 보는 것인가? 대표가 불러도 바쁘다고 오지 않고, 전화해도 잘 받지 않는다고 한다. 대표는 이제 입장이 바뀐 거 아니냐며 씁쓸해한다.
이 남자가 사는 법이 옳다 그르다, 대표가 잘했다 잘못했다 지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은 다양하니까. 또 급하면 덥석 물어버리는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서로 좋은 뜻에서 도와주려고 했다는데 어쩌겠는가. 다만 하노이 X도, 우리 회사 대표도, 베트남에서 사업하시는 모든 분도, 비록 선의라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하거나 눈물을 빼지 않도록 더 세심하게 배려하며 오늘도 무탈하게 사업하시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