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당하고 모르고 당하고
여느 때처럼 발권하고, 짐을 부치고, 출국심사대로 향하는 긴 대기 줄에 섰다. 차단봉으로 만들어진 꼬불꼬불한 길이 사람들로 들어차 있다. 대기 줄이 직선일 때보다 초조감이 유의미하게 감소한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물에 격하게 공감한다.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면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덜 지루하다. 세 시간 전에 나와도 늘 혼잡하고 오래 걸린다. 수요 측면보다는 공항 자체의 구조적인 시스템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출국 심사 창구가 가까워질 무렵 흰색 드레스 셔츠를 입은 남자가 차단봉 줄을 열고 넘어와 불쑥 내 앞에 끼어든다. 이 나라에서는 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나온 사람이 긴 팔 흰색 드레스 셔츠와 곤색 정장 바지를 입으면 고급 관료 또는 돈 많은 기업가라고 생각한다. 새치기를 감행한 이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이 정도쯤이야 일상에서 다반사로 만나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지만, 그때마다 썩 유쾌하지 않다. 하긴 한국이라고 이런 몰염치한 인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드디어 다음이 내 차례이다. 줄을 선지 30분가량 지났다. 서양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도장이 찍힌 여권을 집어 든다. 앞으로 나갈까? 망설이는 순간 짙은 녹색 공안 복을 입고 별이 달린 모자를 쓴 남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흘려본다. 나오라는 뜻일 거다. 남자 앞에 서서 여권을 항공권과 함께 내밀었다. 내 여권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남자는 다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다.
내 얼굴을 확인하는 건가? 아니다. 뭔가 부족하다. 나는 재빠르게 가방 속에서 베트남 거주증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거주증과 여권을 번갈아 들여다보던 남자는 꽝하고 도장을 찍은 다음, 거주증을 여권 사이에 끼우고는 툭 하고 앞으로 내려놓았다. 여권에는 비자 만료 기간이 거주증 받기 이전까지 날짜로 표시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름 눈치 빠르게 대처한 것이다. 즉, 비자의 만료 기간이 이미 경과했으므로, 이후 발급받은 거주증을 제시해야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은 죄도 없는데 뭐가 이리 조마조마한지 번번이 그 이유를 모르겠다.
다음은 몸수색과 짐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인생은 줄 서기라고 했던가? 맞아, 줄 서기를 잘해야 한다. 엑스레이 검색대 게이트 두 개가 운영되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 수는 적었지만, 왼쪽 검색대로 가려면 다섯 걸음 정도 더 가야 하기에, 그냥 바로 앞 검색대를 통과하기로 했다. 기내용 캐리어를 들어 올려 컨베이어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백 팩 안의 휴대폰과 노트북, 탭을 꺼내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고, 다른 바구니에 신발과 백 팩을 담아 검색대 컨베이어 롤러 위로 밀었다. 짐들이 앞쪽으로 진행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는 네모난 문을 지나서 탐지기로 몸수색을 받고 엑스레이 투시기를 통과한 내 짐을 다시 챙기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할 때 화장품을 뺏겼던 일이 떠올랐다. 웬만하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성격인데 급한 마음에 허둥거리다가 엉뚱한 일을 겪고 말았다. 이제 평정심이라는 단어에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건만, 여전히 쉽지가 않다.
공항으로 출발하려고 집에서 나오기 직전 문득 큰 가방 중량에 신경이 쓰였다. 베트남에 없는 내가 쓰는 화장품을 여러 가지 챙긴 탓에 가방이 꽤 무거웠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짐이 없었기에 제한 중량을 넘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체중계에 올려보니 역시나 23kg을 초과했다. 불길한 예감은 자주 들어맞는다. 다행히 기내용 캐리어를 올려보니 7kg으로 여유가 있었다. 급히 큰 가방에서 샴푸와 화장품 몇 개를 꺼내어 옮겨 담았다. 정말 무심코 그랬다. 왜 살다 보면 알면서도, 조심하다가도, 느닷없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때도 있지 않은가?
결국 공항 수하물 검사대에서 100ml가 넘는 것들을 몽땅 빼앗겼다. 다시 나가서 위탁 수하물로 부치라는데 시간도 촉박하고 따로 요금을 더 내야 해서 배보다 배꼽이 크다. 그냥 쿨하게 포기했다. 검색대에서 그걸 잡아낸 젊은 여성분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거 다 버리는 거'라고 한마디를 보태서 내 염장을 질렀다.
당연히 내 잘못이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부하가 치민다. 신발을 다시 신고, 소지품을 챙긴 다음, 백 팩을 막 집어 들려는 순간이었다. 이제 백 팩을 챙겨 들고 탑승구로 가면 끝이다. 이번에는 별 탈 없이 무사히 통과하는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모든 출국 절차가 끝나기 딱 10초 전이었다.
깡마르고 작은 키에 국방색 제복을 입은 나이 든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모자를 쓰지 않아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베트남에서는 이렇게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현장에서 보기 힘들다.
"가방 좀 열어 보겠습니다."
"네? 이거요?"
"돈을 얼마나 휴대하고 있습니까?"
"돈요? 얼마 안 되는데... 왜요?"
엑스레이 투시기에 찍힌 내 가방 내부 사진이 모니터 화면에 정지된 상태로 있었고, 그 앞에 앉아 있는 공안이 어떤 부분을 가리키며 흰머리와 눈빛을 교환했다. 뭐야! 하는 마음으로 돈을 다 꺼내어 보여주었다. 흰머리는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폐를 한 장씩 일일이 세어보고 금액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Give me passport.”
100m쯤 될까? 여권을 빼앗긴 나는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백 팩을 등에 둘러멘 채 그 남자를 따라갔다. 아니 끌려가는 거와 다름없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쪽 구석,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작은 사무실이었다. 접는 간이침대 같은 것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직원 휴게실 정도로 보였다. 안쪽으로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커튼식으로 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병원 응급실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늘색 천으로 된 가림막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취조실인가? 이대로 출국 못하고 공안에 잡혀가는 건가? 근데 도대체 나는 왜 여기 끌려 온 거지? 돈이 문제였나? 혹시 위조지폐?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흰머리는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를 내어주며 책상 옆쪽에 앉으라고 손짓한다. 책상 맞은편이 아닌 옆쪽에 앉으라는 것을 보니 범죄자 취급은 아닌 것 같다. 하긴 범죄 혐의였다면 벌써 트럭에 실려 잡혀갔을 것이다. 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문제 삼으려는 걸까?
의자에 앉은 나를 한 번 살피고는 이제 시작해 보자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서랍을 뒤적거려 서류 뭉치를 하나를 찾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안내문인지 공문인지 그 뭉치 중에서 한국말로 적혀있는 한 장을 내 쪽으로 밀어 놓고 읽어 보라고 손짓한다. 꼬질꼬질한 그 문서에는 표와 문장들이 섞여 있었고 태극기와 베트남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협정으로 베트남 돈은 1,300만 동 이상 소지하고 출국할 수 없다는 내용에 노란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런 규정이 있었어? 아니, 700만 원도 아니고 70만 원이 한도라고?
당시 내가 소지한 돈은 가방 속 지갑과 편지 봉투에 따로 넣어 둔 것까지 총 3,000만 동이었다. 한국 돈으로 치면 약 170만 원 정도이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입국하면 호텔 격리 비용이 14일간 140만 원이었고, 방역 택시비 등 부대 비용까지 하면 그 정도는 있어야겠다 싶어서 현금으로 가지고 나왔다.
어쨌든 그 협정에 의하면 나는 반출 허용 한도의 배가 넘는 3,000만 동을 몰래 가지고 나가려 한 것이다. 문제가 될 만한 그리 큰돈은 ‘당연히’ 아니라는 생각에 반출 한도 금액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보통 우리나라는 출입국시 외화 반출입 허용 한도액이 1만 불 정도이기 때문에 거기에 15%도 못 미치는 금액이 문제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다.
다행히 흰머리나 나나 영어 실력은 비슷한 거 같았다. 흰머리에 의하면, 나는 지금 출국할 수 없고 내일 공안으로 출두해서 소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발 한 시간 전인데 출국할 수 없다니, 비행기 표 값이 1,000만 동인데? 출국 준비한다고 오늘까지 애쓴 노력은? 앞으로 스케줄은 또 어쩌고?
급히 회사 통역 직원에게 전화했다. 스피커 폰을 통해 삼자 대화를 해 보았지만 같은 말의 반복이다. 결론에 변함이 없다. 공항에 있는 은행이나 ATM에 가서 차액을 입금하고 오겠다는 요구도 거절당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 정도면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 컴드억(khȏng được ; 안됩니다) 한마디를 내뱉고 나면 끝이다.
막막하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출국을 여기서 포기해야 한다니. 가진 돈 전부를 압수당한 다음, 한 시간쯤 기다려서 위탁 수하물을 찾고, 택시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비행기 표를 취소하면 수수료는 얼마를 공제할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공안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을 것이고, 아마 적지 않은 금액의 벌금을 얻어맞을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까부터 흰머리가 좀 이상하다.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서류를 내려다보고, 출입문을 노려보기도 하면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건가?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집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다. 제발 생각해! 뭐든 얼른 생각하라고! 그동안 베트남살이 경험을 살려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결정했다. 내가 내놓을 승부수는 비교적 간단하다. 좋아, 둘 중 하나야. 도 아니면 모다.
삼국지에서 읽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토착 부호들한테 군량미를 요구하자, 대부분 부호들은 이게 최선이라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일부 식량을 제공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자신의 전 재산을 걸겠다며 창고에 있는 식량을 몽땅 쾌척했다. 이후 결론은 뻔하다. 모든 것을 던진 그 사람은 목숨도 구하고 그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
그래,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 흰머리의 태도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번역기를 통해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꼭 출국해야 하는 것 같으니 특별히 봐준다는 취지였다. 그래 알아, 안다고. 그러니 그렇게 갑자기 친절하지 않아도 돼. 그런 황당한 규정을 미리 체크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뭐. 이제 그만하고 빨리 나를 보내주기나 하세요.
그를 따라 다시 조금 전의 그 수하물 검색대로 갔다. 모든 짐을 엑스레이 투시기에 통과시키더니 챙기는 걸 거들어 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떠나려는 나를 향해 웃으며 인사한다.
"Good by, sir. Thank you, sir."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련의 흐름으로 볼 때, 현금 소지 한도를 넘는 경우가 내가 처음은 아닐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쓰린 속과 벌렁거리는 가슴을 달래 가며 탑승 게이트에 도착했다. 막 탑승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