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에서 다낭 VS. 한국에서 다낭

고무줄 비행기 스케줄

by 화문화답

가족들이 다낭에 도착하는 날이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지난 며칠 힘들었어도 이날을 생각하며 잘 넘길 수 있었다. 이 나라에서 일하다 보면 언어나 문화적 차이, 비즈니스 환경, 극한의 더위 때문에 체력 소모가 많은 편이다.


가족들을 내가 있는 호찌민으로 초대하지 않고 다낭을 택한 이유는 일단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인 호찌민에는 가족들과 같이 놀 거리가 특별히 없다. 반면, 다낭은 관광지로 특화되어 있고 관광 인프라가 나름 갖추어져 있으며 호이안이나 바나힐 같이 주변에 가볼 만한 곳이 있다. 정서적으로도 우리가 제주도 또는 강릉 하면 떠오르는 느낌하고 비슷하다.


곧 도착할 우리 가족들도 미케비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거나, 바잉 쌔오(bánh xèo)의 느끼함에 열광하거나, 기프트숍에 가서 노니 가루를 비싸게 사거나, 해산물 바비큐 식당에서 바가지 랍스터를 먹거나 하는 다낭 여행을 경험할 것이다.


호찌민에서 다낭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가족들이 출발하는 인천 공항에서 다낭까지 최소 5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에 비하면 바로 코 앞이다. 내가 먼저 가서 좀 쉬다가 가족을 맞이하러 공항으로 나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마음은 앞서 가는데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그런 날 말이다. 이날도 그랬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동안 좀 쉬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결과적으로는 한국에서 다낭이나, 호찌민에서 다낭이나 비슷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비행기 스케줄 탓이다. 관광 수입을 주 소득원으로 하는 나라임에도 베트남의 항공 운송 체계는 예기치 못할 일들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진다.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울 것을 대비해서 정리할 일들 서둘러 마무리하고 오후 3시에 사무실을 출발했다. 운전기사가 떤선녓공항(Sân Bay Quốc Tế Tân Sơn Nhất)에 나를 내려주고 퇴근 시간 이전에 회사로 돌아오려면 이 시간에는 출발해야 한다.


호찌민의 교통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고 매우 혼잡하여서 느긋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다가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늦을 것을 대비해 조금 일찍 출발하면 또 너무 일찍 도착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예상보다 30분 빠르게 4시쯤 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베트남항공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하고 보딩패스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뱀부 항공을 선호하지만, 비행 편수가 너무 적고, 비엣젯은 소형 항공기인 데다가 스케줄 변동성이 큰 편이라서 주로 베트남 항공을 이용한다.


그런데 카운터 직원이 비행기 표를 받고 돌아서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무슨 얘기를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언어적 특성 때문인지 민족 성향 때문인지 짧은 결론을 길게 말한다. 요약하자면 첫째, 캐리어가 수화물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할 때까지 옆에서 대기해라. 당연하지! 둘째, 내가 타려는 비행기가 50분 정도 지연된다. 아이고 또 지연이야? 입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보안 검색대 앞에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어떤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뭐라고 했더라? 50분? 50분 지연이라고? 갑자기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처음 예약할 때 7시 30분 비행기였던 VN136 편의 출발 시각이 이틀 전에 6시 55분으로 변경되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6시 55분 비행기를 타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아까 카운터 직원이 내가 타려는 비행기가 50분 지연된다고 했다.


운항 정보 안내 보드에 적힌 'Scheduled 18:55'와, 'Estimated 19:45'를 보는 순간 그 불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실해졌다. 처음 예약할 때 7시 30분 비행기가 6시 55분으로 당겨졌다가 다시 처음보다 더 늦은 7시 45분에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지금이 4시 30분이니까 앞으로도 무려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였기 때문에 되돌아 나갈 수도 없다.


회사 차를 돌려보내는 시간을 고려해서 일찍 나온 탓도 있기는 하지만 공항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다. 무슨 비행기 스케줄이 이렇게 고무줄 같을까. 공항 도착 직후 이 상황을 먼저 파악했더라면, 아니 카운터에서 발권하기 전에 미리 설명을 들었다면 당연히 앞 비행기로 시간을 변경했을 것이다. 비싼 취소 수수료를 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일찍 가서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낫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이 나라에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살려면 그저 모든 결과를 내 탓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하릴없이 공항을 몇 바퀴 돌다가 버**에서 햄버거 한 개를 사 들고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공항이라면 당연히 무료 와이파이가 제공되어야 하거늘 무슨 기업하고 광고 제휴가 되어있는지 네트워크로 접속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보안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았다. 미리 내려받아 두었던 전자책 화면을 열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곤 계속되는 킬링 타임!


베트남에서 비행기를 타다 보면 이런 고무줄 스케줄이 다반사이다. 대부분은 승객이 적으면 스케줄 하나를 취소하고 두 개를 하나로 합치기도 한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공항이나 항공사의 사과 한마디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도 어떤 사람도 불만을 품거나 이의 제기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젠가 하노이 출장을 다녀오던 날, 밤늦은 시간이었다. 호찌민 떤썬녓 공항에 접근하던 비행기는 착륙을 위해 하강하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줄을 지어 반짝거리는 도시의 불빛들이 내다보였다. 아, 이제 도착했구나. 피곤하다. 그래도 이번 출장은 결과가 있었어. 그렇게 마음속으로 지난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비행기가 갑자기 큰소리를 내며 급강하했다. 그러다가 다시 급상승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뒤로 넘어갔다.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고, 너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비행기 안이 조용했다. 아니 평온했다. 승무원들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잠시 공중을 선회하는듯하더니 다행히 이번에는 무사히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비행기 안에서나 착륙한 이후에도 이 상황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나 안내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위험 상황이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어떤 동요도 없이 태연했다. 항의하거나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고, 각자 자기 발걸음을 옮기기에 바쁜듯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여의치 못하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왔다.


호찌민의 떤썬녓 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나 그랍을 타기 위해서는 맞은편 다른 건물로 이동해야 한다. 그 동선이 복잡해서 처음인 사람은 당황하기에 십상이다. 앞서 가는 사람들 흐름을 잘 따라가야 한다. 게다가 질서라는 개념이 없어 말 그대로 난리 법석이다. 다행히도 다낭공항에서는 떤썬녓 공항과는 달리 그랍을 쉽게 부를 수 있고 시내까지 거리도 가깝다.


호텔에 도착하니 9시 반, 체크인을 하고 나니 10시였다. 그러니까 호찌민 사무실을 나선 지 7시간 만에 숙소인 호텔에 도착한 것이다. 가족들을 맞이하기 위해 다시 다낭공항 국제선 입국장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한 시간쯤 지나서 드디어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 시각으로 오후 1시 반,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 반에 집에서 출발했다고 했으니까, 결론적으로 가족들이 한국에서 다낭까지 온 시간이나 내가 호찌민에서 다낭까지 온 시간이나 걸린 시간이 얼추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