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야

일촉즉발 유치원

by 화문화답

오전 10시인데 벌써 체감온도가 36도를 넘나들고 있다. 차 창을 내리자 열기가 훅하고 밀려 들어온다. 이 뜨거운 거리를 오토바이를 탄 베트남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민족이다.


하노이 출장을 다녀온 이후 피로가 풀리지 않아 몸 상태가 썩 좋지 않다. 몇 번을 망설이다 사무실을 나섰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오전에 3공장을 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꼭 무슨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야 공장 직원들이 늘어지지 않고 긴장한다.


평소 같으면 회사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오늘따라 차가 유난히 막힌다. 확장 공사를 하는지 온통 파헤쳐놓은 도로는 가뜩이나 험난한 차량 흐름을 최악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한국도 아직은 그리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베트남의 도로 공사 현장은 좀 더 어수선하다. 안전 조치나 이용자에 대한 배려, 소음이나 진동, 먼지에 대한 대비가 많이 부족하다. 공공서비스 시스템과 마인드의 개선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셉(sếp)!' 하고 기사가 부른다. 일반적으로 쓰는 직장 상사에 대한 호칭이다. 한 번은 어떤 직원이 대표를 '미스터'라고 불러 대표를 노발대발하게 만들었다. 대표는 젊은 나이에 비해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 이후 호칭을 '보스' 또는 '사장님'이라고 부르도록 했음에도 그냥 본인들이 편한 대로 셉이라고 한다.


눈을 떠보니 차가 3공장 쪽으로 유턴하고 있다. 도착한 것이다. 마침 휴식 시간인 듯 정문 앞쪽으로 남자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어휴, 저 인간들 또 담배를 피우고 있네. 하긴 공장 밖으로 나가게 한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상하차 작업을 하면서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차에서 내리는데, 그들 뒤편으로 뭔가 배경처럼 깔린 낯선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빨갛고 노란 불꽃 춤, 그놈은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잡아먹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불이다. 불이 났다. 불타는 바닥은 두 평 정도의 넓이이고, 불길의 높이는 이미 사람 허리만큼 올라오고 있다.


공장과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치원이 있다. 마당에는 트램펄린, 목마, 정글짐, 미끄럼틀 같은 놀이 시설이 군데군데 놓여 있고 아주 작고 예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이 가끔 눈에 띄기도 한다. 불이 난 지점은 바로 그 유치원의 미끄럼틀 근처이다. 그 미끄럼틀에서 담장 하나를 넘어 불과 2m도 안 되는 곳에 공장 남자 직원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고 있다. 그 옆쪽으로는 음료수를 파는 리어카 행상 아주머니가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지만 당황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는 황급히 그들 쪽으로 뛰어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저기 불났잖아! 안 보여?"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내 기세에 눌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어서 자기들끼리 무슨 토론을 한다. 아마도 자신들의 담배꽁초가 원인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누가 그랬는지 책임 규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당 끝에 있는 수도로 달려간다. 양동이에 물을 받는다. 다시 와서 불을 끈다. 이 과정을 이어서 계속한다. 급한 마음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나 뒤쫓아온 통역 직원이 소리를 지르며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그렇게 30초쯤 지났을까? 그들은 수도가 있는 쪽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아직은 114를 부르거나 소화전을 끌어올 정도는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화재 신고는 114이다. 내가 공장 안으로 달려가 소화기를 찾아들고 오는 사이 몇 동이 물을 뒤집어쓴 불은 기세를 잃고 꺼져가고 있었다. 검게 타버린 낙엽들과 꺼진 불 위로 희뿌옇게 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닥을 뒤집어 가며 소화기를 뿌려 혹시 모를 불씨를 완전히 제거했다.


만약에 내가 오늘 오지 않았다면,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뒤늦게나마 이들이 민첩하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면, 이 불이 커져서 유치원을 집어삼켰다면... 끔찍한 일이다. 소름이 돋았다.


한바탕 소동이 있고서야 유치원 관계자들이 달려 나왔다. 아이들이 안에 있을 때면 늘 유치원 정문은 굳게 닫혀있어서 사람들이 내왕하지 않는다. 우리 쪽 직원이 무심코 담배꽁초를 그쪽으로 던졌을 것으로 짐작된다면서 유치원 측에 정중히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특별히 배상을 해줘야 할 것은 없었다.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직원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시키고 일단 사태를 마무리했다.


대표한테 이 사실을 전하자 바로 달려왔다. 검게 그을린 현장을 보더니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을까. 대표는 고맙다고, 하마터면 베트남 유치장에 들어갈 뻔했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내 마른침을 삼켰다.


전사 차원에서 안전 관리 대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화재뿐만 아니라 지게차 같은 중장비 운행, 승강기 및 컨테이너에 화물 상하차 작업 시 안전 수칙을 정해서 반복 교육을 진행하기로 했다. 미끄럼 사고 등 위험 요소가 내재하여 있는 계단에 미끄럼 방지 테이프를 붙이고 머리를 부딪칠 수 있는 모서리 돌출 부분에 쿠션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어색해하고 웃고 떠들기만 하더니, 대피 훈련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전반적으로 안전사고 예방 및 사고 발생 시 대응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한국에서는 산업 현장 안전 문제에 대해 많은 사회적 관심과 대비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베트남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 같은 한국 기업이 모범을 보여주면 선진화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아홉을 잘해야 뭐 하겠는가. 단 한 번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 사업이고, 또 그런 것이 인생이다. 작은 불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는 말로 위안으로 삼아 보지만 아찔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