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죽기 전에 02화

인생은 선택이다

by 화문화답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려면 지금은 법학전문대학원을 가야 하지만 그때는 사법 고시에 합격한 다음 사법 연수원을 거쳐야 했다. 내가 법대에 진학한 것은 사법시험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법시험을 한 번도 보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 인생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대학원까지 등록금 면제와 고시원(기숙사) 제공을 입학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여건이 나쁘지 않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 엄청나다는 사법고시도 두렵지 않았다. 내면이나 핵심을 들여다보는 재주, 논리적인 사고, 이슈를 글로 요약정리하는 요령이 뒤지지 않는 편이다.


자화자찬이지만 그렇다면 고시 공부에 도전할 만한 필요충분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어떤 큰 그림을 가지고 그렇게 인생을 설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름 흥미와 적성을 잘 반영하여 진로를 정했다고 본다.


당시 모든 대학은 신입생 모집 공고를 일간 신문 하단에 엽서 크기의 흑백 광고로 냈다. 아는 거라고는 학교 수업과 공부밖에 없었던 어린 고등학생은, 그 신문 공고를 비교해 보고 가장 장학금 혜택이 좋은 대학을 선택했다. 내 성적이면 무려 대학원까지 6년간 등록금 면제였다. 그 시대 대부분 부모님들이 그랬지만 자식들 굶기지 않는 것에도 급급했던 터라,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유학' 보낼 형편은 못되었다. 게다가 우리 집에는 돈으로 바꿀 '우골(牛骨)'도 없었기에 대학 선택의 기준은 오직 등록금이었다.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진학 상담 같은 건 있지 않았고, 입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설 학원은 가보지도 못했다. 장학금을 포기한다면, 내 성적으로 K대나 Y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어이없지만, 일단 입학하고 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야말로 촌놈이었다.


'법대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입시 정보 부족과 전략 부재를 원망하면서 첫 학기를 방황 속에서 보냈다. 캠퍼스 안에 반정부 시위를 감시하는 사복 경찰이 넘쳐날 정도로 서슬이 퍼랬던 군사 정권 시절이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군대에 가기 시작했고, '학우 여러분, 지금 한가롭게 공부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라고 외치는 메가폰 소리가 난무했지만 나는 도서관에 박혀 책과 씨름하며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종강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행정법을 가르치시던 교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교수님은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많은 연구 활동과 학회 활동으로 학계에서 지명도가 높으신 분이었었다. 머리숱이 거의 없는 넓은 이마에 둥근 얼굴형이었고, 늘 인자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사시사철 흰색 셔츠 위에 녹두색 니트 카디건을 즐겨 입으셨다.


"자네, 내 방에 들어와 공부해 보지 않겠나?"


행정법 시간에 '본의 아니게' 발표를 많이 했고, 성적이 특별히 좋았던 편이기는 하지만 교수님의 이런 직접적인 부름에는 분명 무슨 까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느닷없이 나타난 새로운 길에 발을 들여놓았고, 이후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사법고시가 아니고 연구실에서 교수님을 모시며 '학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대장 시절, 50km 전방 집결지에서 부대까지 걸어서 복귀하는 소대 대항 훈련이 있었다. 야간 행군이라서 지형 파악과 독도법이 중요했다. 결과적으로, 선봉 소대였던 우리 소대는 꼴찌를 하고 말았다. 구겨진 소대장의 체면을 막걸리 회식으로 때우기는 했지만, 소대장 때문에 포상 휴가를 가지 못하게 된 병사들에게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사과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폭 5m, 길이 20m의 다리가 문제였다. 왼쪽으로 꺾인 수풀 길 보다 쉬워 보이는 뻔한 길을 무심코 선택한 것이다. 아니, 다리는 건너라고 있는 거 아니었나? 게다가 그 다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빛까지 내고 있었다고!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길은 늘 어떤 선택을 강요하곤 한다. 그리고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되묻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님과 면담이 있던 그날은 나의 생애 진로가 수정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후회가 된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숙고했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연구실 한쪽 벽면은 책과 자료들로 가득 들어찬 책장이 차지하고 있었고, 넓은 통유리 창가에는 진갈색 소파가 놓여 있었으며, 책장 맞은편 벽면을 향해 교수님 책상과 내 책상이 책꽂이 칸막이를 경계로 가로 세로로 맞닿아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식권 값이라며 검은색 동전 지갑에서 꺼낸 백 원짜리를 하나, 둘 세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걸음이 얼마나 느렸는지 교직원 식당까지 걷자면 속도를 맞추기 위해 자주 문 워크를 해야 했다. 국회 도서관과 이대 도서관으로 대법원 판례를 찾으러 뛰어다니기도 했고, 출판사 문지방이 닳도록 논문 원고 심부름을 다녔다. 내가 학생들 리포트와 답안지 채점을 하고 있을 때면 한 손으로 안경 끝을 살짝 들어 올리고 내 어깨너머를 넘겨다보기도 했다. 여의도 본가와 화곡동 서재는 거의 매일 들락거려야 했다. 'ㅇ군아!'하고 부르는 소리와 함께 열 평 남짓한 공간에서 교수님과 보낸 시간은 4년이었다.


석사 학위를 받고 장교로 전역한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수순은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게도 나에게 또 한 번의 선택을 강요했다. 왼쪽 수풀과 오른쪽 다리 중에서 어떤 길로 갈 것인지 다시 한번 물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결핍에 대한 보상 욕구였을까? 막상 눈앞에 다른 길이 열리자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이 커졌다. 독일로 유학을 가라는 교수님과 선배들의 권유도, 약혼만 먼저 하고 같이 유학을 가는 조건을 내세운 ‘마담뚜’의 제안도 간단하게 외면했다. 그리고 취업을 택했다.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의 길을 가겠다고 목표를 바꾼 것은 잘한 것일까? 취업해서 돈을 모은 다음 유학을 가겠다는 계획은 대체 언제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일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두 자릿수를 기록하던 높은 경제성장률 덕분에 요새 젊은이들처럼 취업이 심각하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 번 정해진 직장은 정년퇴직까지 다니는 평생직장으로 인식되었다. S그룹은 신입사원 연수를 받을 때, 조는 시간에 비례해서 점수를 깎는다는 살벌한 선배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난하게' H 그룹 공채로 입사하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나의 직장 생활 33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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