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 맨 윗줄은 단연코 여행이 차지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평소 목까지 숨이 차오를 때마다 훌쩍 떠나는 것을 유일한 탈출구로 삼고 살지만, 이번 여행에는 보다 '특별한' 일탈을 기획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콘돔 한 박스를 가방에 소중히 챙겼다. 키 크고 몸 좋고 매너가 넘치는, 외국 영화배우 스타일의 남자와 밤을 보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정작 여행지에서는 진짜 그럴 일이 생길까 봐 도망 다니기 급급했고 결국 가져간 '일탈 도구'는 그대로 되 가져왔다. 하지만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어느 에세이에서 본 글이다.
여행이 구원은 아니기 때문에 기대했던 일은 막상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넷플릭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호텔 안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세계테마기행'에서처럼 세세한 현지 문화나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는 것은 여간해서 쉽지가 않고, 매체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비경은 코앞에 두고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을 다 보내고 돌아와 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기 십상이다. 오히려 후유증과 부작용 탓에 한동안 일상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이것이 여행이 가진 양날의 칼이다.
하지만 과음한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하면서 술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다시 저녁에 약속을 잡는 것처럼, 일상의 고단함이 쌓이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난 여행의 실망은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엉덩이가 근질거리고 명치끝에서부터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끓어오른다. 일상으로부터의 해방, 신박한 새로운 경험, 꿈꾸는 작은 일탈, 인생의 전환점, 때로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도 해준다는 여행이 가진 강력한 매력은 모든 부정적 요소를 제압하고도 남는다.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떠나기를 갈망한다.
사실 ‘떠난다’는 일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열에 아홉은 그마저도 실행하지 못한다. 바빠서, 돈이 없어서, 어디로 갈지 몰라서, 혼자라서,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준비하는 것이 귀찮아서. 백가지도 넘는 핑곗거리가 떠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일단 떠나는 것만 해도 대단한 반전이며 성취이다. 그러니 기대에 좀 미치지 못했더라도 너무 실망할 건 없다.
분명히 경이로울 것인 이 월드 트래블 계획은 아내의 동반을 전제로 한다. 다만, 내가 선호하는 여행 콘셉트는 패키지 관광보다는 열흘이고 한 달이고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무르는 체류형임에 반해, 아내는 깃발을 든 여행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이나 안내를 받는 '깃발 관광'을 선호한다. 푸껫 클럽메드 같은 곳에 가서도 코끼리 *냄새 맡아가며 코끼리 트레킹을 해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국내라면 혹시 모를까 외국 여행을 아내를 두고 나 혼자 떠나는 일은 없다. 게다가 해외여행은 경제적 효율과 심리적 안정 면에서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함께 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녀석들이 원할지는 모르겠다.
동남아는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깝고 동양 문화의 신비로움과 깊이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물가가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에 경제적인 호사를 누려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특히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마사지 같은 다양한 인적 기반 서비스를 즐길 수 있다. 다만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현지인을 대할 필요가 있다. 너무 눈에 띄는 생활을 하면 자칫 범죄의 타깃이 되거나 함정에 빠져 흥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베트남이 좋긴 하지만 나는 이미 살다가 왔고 가족들도 다녀온 적이 있으므로 패스한다. 태국의 치앙마이 한 달 살기는 해 보고 싶지만 일단 찜 해놓고 좀 더 상황을 살펴보고 결정하기로 한다. 방송에 여러 번 소개된 이후로 여행사 상품이 난무하게 되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고 한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다운타운 보다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오래 머무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더운 나라 특유의 자연경관을 즐기면서 조금은 사치를 누려 보는 것도 괜찮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나 베트남의 후에 같이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는 일단 비싸다. 유적지 몇 곳을 돌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기본적으로 입장료가 비싼 데다가 의무적으로 현장 가이드를 따로 불러야 한다든지 골프 카트같이 생긴 차를 별도 비용을 내고 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적응력과 순발력이 좋은 젊은 관광객들과는 달리, 웬만하면 시키는 대로 하는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다니다 잘못하면 여기서 살아야 돼요.'같은 말로 가이드가 은근히 겁을 주기도 한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 멀지만 더 이상은 나를 버리고 살 순 없어. 떠나자 지중해로 잠든 너의 꿈을 모두 깨워봐. 나와 함께 가는 거야 늦지는 않았어. 가보자 지중해로 늦었으면 어때 내 손을 잡아봐. 후회 없이 우리 다시 사는 거야. 떠나자!" 가수 박상민이 부른 '지중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나의 애창곡이다.
몰타는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섬나라이다. 강화도와 비슷한 면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자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힌다. 중세 풍의 도시와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펼쳐져 있고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다만 물가가 그리 싼 편이 아니어서 오래 머무르기에는 다소 부담이 된다는 단점이 있다. 파인애플 주스 한 잔에 무려 10유로(한국 돈 14,000원)라니! 파인애플 주스는 가급적 사 먹지 말자.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러 떠나자. 만약 여건이 된다면 그리스의 산토리니는 옵션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자연경관이 빼어나며 이국적이고 감성적인 환경을 자랑한다. 이민 가서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지역이 많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북유럽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문화 코드를 형성하고 있어 사람들의 자부심도 강하다고 한다. 인생 여행으로 남을 확률이 크지만, 철저하게 여행 계획을 짜고 예약을 선행해 놓아야 경비도 절감하고 난감한 일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돌발 상황이나 의외성을 여행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험한 일을 당하거나 예기치 못한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면 기분 잡치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최선이라면 좋겠지만 최악은 피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언어, 문화, 환경, 시스템이 다른 타국이기 때문이다. 외국 살이를 해 본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다. 특히 북유럽 국가들을 여행할 때는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에 있는 감라스탄과 시청 청사, 핀란드 헬싱키 대성당, 노르웨이의 항구 도시인 베르겐과 게이랑에르 피오르, 안데르센이 살았다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뉘하운 항구와 아말리엔 보그 궁전을 돌아보려면 적어도 10박 이상 잡아야 한다. 북유럽은 가급적 패키지여행을 택하는 걸로 하자. 아이슬란드의 빙하와 오로라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전문 가이드의 동행과 별도의 여행 계획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일단은 제외한다.
남태평양 보라보라 섬을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지상낙원이라고 표현한다. 작가 김태연은 이 외딴섬에서 9년간 생활하며 '우리만 아는 농담'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그곳에서의 삶은 "마음이 지칠 때면 바다로 나가 물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마당에다 망고나무를 키우고, 패들 보드를 타고, 바비큐 파티에 놀러 가고, 민트를 뜯어다 모히토를 만들어 마시고, 은하수 별빛 아래에서 저녁을 먹는 슬로 & 미니멀 라이프" 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최지은 칼럼니스트는 "열아홉 시간의 시차만큼이나 멀리 떠나, 식탁을 차리다 갑자기 전기가 끊기는 바람에 녹으면 안 되는 식재료부터 서둘러 먹어 치우고, 뒷마당에서 모기떼의 습격을 당해 비행기로 응급실에 후송되는 삶이라니. 그곳이 천국일 리는 없다. 하지만 왜인지 알 수 없는 대목에서 미소를 짓다가도 눈물이 고인다. 내일의 일도 모르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대책 없는 낭만, 대책 없는 용기, 대책 없는 믿음… 그러니까, 참 이상하면서도 반가운 일이다."라고 서평에 썼다.
어쨌든 나도 이 섬에 가고 싶다. 하지만 일단은 물음표 하나를 크게 붙여 놓는다. 그 압도적이고 비현실적인 비주얼만큼 실현 가능성 또한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전기가 끊기거나 모기떼의 습격을 경험하기보다는 럭셔리 해상 리조트에서 묵는 것이 보라보라 섬의 킬링 포인트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포**스 같은 호텔 1박 요금이 100만 원을 훨씬 넘는다니 좀 고려해 봐야 할 점이 있기는 하다.
생각만으로도, 적는 것만으로도 몸이 둥둥 떠 다니는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이지만 당연히 즉각적으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 인생이 그러하듯 어떤 선택과 결정은 먼저 발을 땅에 디디고, 취사선택의 지난한 과정을 넘어야 비로소 결론이 난다. 시작은 아내가 정년퇴직을 하는 2년 후이다. 2년에 한 번 정도로 사이 기간을 두고 떠난다면 십 년은 족히 걸리겠다. 그러면 어때,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는가? Beautiful world라니.
오늘부터 당장 여행 영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현지에서는 영어를 하고 못하고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생활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해외에서 구글 번역 앱 가지고 버벅거려야 하는 상황은 많이 불편하다. 2년쯤 후에는 이어폰만 꽂으면 동시통역이 될 정도로 빅데이터나 딥러닝 기술이 발전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고 영어 공부를 대체 몇 년을 했는데 여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