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 주연의 "버킷리스트"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다. 죽음을 앞에 둔 두 주인공이 한 병실을 쓰게 되면서 남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를 만들고, 급기야는 병실을 뛰쳐나가 이를 하나씩 실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버킷리스트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나서 처음에는 한 30개쯤 그냥 쭉 적었다. 그런데 볼수록 유치하고 구구절절해서 찢어 버렸다. 그냥 되는대로 막 적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번호 '1'을 적었지만 이번에는 한 개도 적지 못했다. 이게 막상 쉬운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버킷리스트에 대해 어떤 스텐스를 가지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을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로 도서 검색을 해보았더니 국내 도서만 100여 종이 넘었다. 누가 이런 책을 쓸까 했는데 의외였다. 대부분이 여행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이것들을 제외하고 눈길을 끄는 책 두 권을 골라 단숨에 읽었다. 강창균, 유영민 작가의 '버킷리스트'와 유다은 작가의 '너의 버킷리스트'였다.
위암 말기 환자의 단지 사과 한쪽 먹고 싶다는 가슴 아픈 버킷리스트, 과속 카메라 앞에서 가속 페달 밟기와 좋아하는 영화배우 ***에게 사랑 고백하기 같은 발칙한 바람, 의사의 오진으로 시한부 통보를 받고 나서 세계 일주로 전 재산을 탕진했지만 후회는 없다는 64세 노인의 웃픈 사연, 르윈스키와 SNS를 하고 싶다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재치 넘치는 희망 사항...
그중 60세 아직 미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미츠키라는 여성의 버킷리스트에 관심이 갔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미츠키는 자신의 버킷리스트 맨 윗줄에 '10일간 사랑하기'라고 적었다.
"무언가를 위해 평생을 일했지만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지난 시간들이 공허하기만 하다. 노을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지만 혼자라는 사실에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누군가와 함께 노을과 칵테일에 취하고, 해변을 걷고, 레스토랑에 마주 앉아 오붓한 식사를 즐기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침대에 누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사랑을 나누고 싶다."
그런데 이 버킷리스트의 레퍼토리가 어딘지 낯익다. 기억이 36년 전으로 내달린다. 교수님 연구실에서 생활하던 시절, 도무지 '시간'이라는 걸 내기 힘들었다. 그 흔한 미팅은 고사하고 영화 한 편 제대로 보지 못하는 메마른 논 같은 일상이었다. 주변 경치에 눈길을 돌릴 수도, 다른 칸을 넘겨다 볼 수도 없는, 목적지가 명왕성 정도 되는 폭주 열차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들 만으로는 무더위를 식혀내기가 버거운 듯 선풍기 두 대가 유난히 덜덜거리며 신음을 토해내던 날이었다. 한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돌부처처럼 꼼짝도 안 하시는 교수님 눈치를 보면서 가끔씩 연구실을 나가 복도를 서성였다. 복도가 그나마 시원해서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교수님 연구실이 모여있는 5층 복도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그때 멀리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서서히 걸어 나오고 있는 것처럼. 어? 저 친구가 무슨 일로? 얼굴을 덮은 그림자가 점차 걷히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올 때쯤 휴학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거의 2년 만이었다.
법대에서 유일한 같은 학번 여학생이었다. 당시에는 법대에서 여학생 보기가 공대만큼 드물었다. 그는 모범생 타입의 짧은 단발머리에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멜빵바지 같은 옷을 자주 입었다. 다른 학생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고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축제 때면 파트너 기근에 목말라하던 법대 남학생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관심이 없다는 명확한 태도를 보였다. 항상 강의실 맨 앞 줄에 앉았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강의실을 나가던 친구였다.
다른 교수님 실에 용무가 있나 보다 하는 순간, '형!' 하며 나를 불렀다. 요새 용어로 남사친과 비슷한 개념으로 남녀 관계를 배제하고 단순히 본인보다 연장자인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나? 나 부른 거야?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인사하는 나에게 그가 무언가를 쭈뼛쭈뼛 내밀었다. 영화 티켓이었다.
당연히 나하고 따로 만나거나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본 적도 없었는데 이날 영화표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남녀 사이의 어떤 '내적 혼란'을 겪을 사이가 아니었기에 잠시 얼떨떨했지만, 마침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잘 됐다고, 그럼 같이 가자고 했다. 이 엄청난 용기와 성의를 거절할 만한 이유도 딱히 없었고, 그냥 영화 한 편 보는 건데 뭐.
하지만 교수님만 바라 보고 책만 파던 24살 청년의 로맨스는 그게 전부였다. 그가 뭔가 할 말이 있어 일부러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연구실로 돌아오기 바빴다. 그렇게 보게 된 영화가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7일간의 사랑(Man, Woman and Child)'이었다.
대학교수인 밥 백워드는 어느 날 프랑스에 있는 친구로부터의 여의사 니콜에 관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10년 전 학회 참석차 떠났던 프랑스 여행 도중 가졌던 짧은 밀애로 아이가 태어났고, 홀로 아이를 키우던 그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밥 백워드는 아내의 이해를 받아 아들 쟝끌로드를 자신의 가정으로 초청하지만 결국 딸들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가족들의 갈등을 지켜보던 어린 쟝끌로드는 귀국을 결심하고 쓸쓸히 공항으로 떠난다.
제목인 'Man, Woman and Child'에 충실한 스토리이다. 이걸 '7일간의 사랑'이라고 번역하다니 꽤 낭만적이다. 사실 프랑스 해변의 아름다운 노을과 공항으로 떠나기 전, 큰 식탁에 마주 앉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 그리고 배경 음악으로 흐르던 나나 무스쿠리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역시 꽤나 낭만적이었다.
'10일간의 사랑'을 버킷리스트에 적은 '60세이지만 아직 미혼'인 미츠키도 혹시 이 영화를 보았을까? 그도 여의사 니콜처럼 밥 백워드 같은 남자를 만나 노을이 지는 프랑스 해변을 거닐고 싶은 것일까? 60이라는 나이가 좀 걸리기는 하지만 외국의 경우 유교적 질서가 엄격한 한국에 비해 백발노인들도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또 상대가 반드시 밥 백워드가 아니어도 괜찮다면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무언가를 위해 평생을 일했지만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지난 시간들이 더 이상 공허하지 않도록 미츠키의 버킷리스트 ‘10일간 사랑하기’가 꼭 이루어지기를 응원한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살면서 하고 싶은 일, 하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은 많았다. 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거나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전보다 여건이 나아졌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나 돈 같은 기본적인 자원의 가용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즉,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치킨을 실컷 먹고 싶다든지 하는 소소한 일들은 아니다. 웃고 넘길 정도로 너무 가볍지 않은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로또 복권이나 맞아야 가능한 초호화 세계 일주나 우주여행같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면 희망 고문일 뿐이다. 상대적 박탈감만 커질 뿐이다. 또한 살면서 차곡차곡 쌓인 소망이 담겨있어야 한다. 적당한 세월의 무게감 말이다. 그래야 ‘이 정도면 충분해. 하고 싶은 것들 다 해봤으니까 크게 손해 보는 인생은 아니었어.’라고 죽기 전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낭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낭만이 있어야 하고 나에게 선물 같아야 한다. 평소 좋아했지만 한참 동안 듣지 못했던 노래 한 곡을 찾아 볼륨을 두 배 정도 높였다. 가사며 멜로디며 구구절절 와닿는다. 좋아! 나의 버킷리스트의 메인 테마가 정해졌다.
낭만에 대하여!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