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은 형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왔는가
사각형같이 단순한 형태를 볼 때도, 우리는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은 사람에 따라 특정한 연상이 될 수도 있고 감정일 수도 있다. 개개인 마다 한 평생의 경험에 따라 형성된 서로 다른 인지체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점과 선 면과 색 같은 기초 조형요소나 그것들의 상대적 배치인 "형태"는 분명 인간에게 어떠한 인지적/감정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뇌는 눈앞의 대상을 시각 처리할 때 실제 모습 그대로 인지하지 않는다. 뇌는 그 대상을 기초 형태로 분해하여 재조합하기도 하고, 경계선 같은 특정한 요소를 더 강하게 인식하기도 하며, 대상에 감정이나 기억을 결합시키기도 한다. 안구를 통과한 형태는 단순한 모양을 넘어서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진, 자극을 주는 대상으로 재조립된다.
이렇게 어떤 형상을 볼 때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 있는 반면, 문화적으로 학습된 무언가도 분명 대상을 인지할 때 영향을 준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마다 특정 형상을 볼 때 상기되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각 문화권마다 공유하는 경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류가 형태에 의미를 부여한지는 적어도 4만 년 이상 지났다. 그동안 인류는 형태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는가? 특히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형태를 어떻게 인식할까? 동양의 종교적/사상적 맥락에서, 동양인의 사고방식에서 형상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그 형태는 어떤 의미를 부여받게 될까? 스기우라 고헤이의 저서 <형태의 탄생>은 바로 그것을 탐구하는 책이다.
책에서는 형태라는 단어부터 재정의 한다. 동양 문화권에서 형태는 '가타'와 '치'로 구성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먼저 단순한 모양, 형상은 가타라고 표현한다. 가타는 어떠한 껍데기, 틀, 모양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인간에게 그 모양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떠한 것으로 재인식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그것이 '치'이다. 가타에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렇게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가타'에 '치'라는 영혼이 부여됨으로써 형태가 탄생한다.
형태의 탄생은 형태와 문양에 어떠한 "치"(의미)가 부여되어 왔고 그것이 동양의 사고방식, 철학과 종교를 담게 되었는지 신선하고 흥미로운 시각으로 탐구한다. 선과 네모, 원, 구, 소용돌이 같은 형태와 그것들의 조합은 동양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형태는 쌍을 이루기도 하고 문자가 되기도 한다. 지도와 같은 2차원 면이 되기도 하고 책과 같은 3차원 형태가 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형태로 표현하고 거대한 시공간 속의 우주를 담은 형태가 탄생하기도 한다. 이 책은 동양적인 사고와 감수성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각 요소에 형태를 부여하고, 형태에 담긴 의미를 해석한다.
이 책은 동양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던 내 편견을 깨 주었다. 먼저, 형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서양의 방식이 더 우월하다는 시각이다. 책을 읽으니 서양과 동양에서 형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의 선택압을 받았을 뿐 더 진보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에서 형태는 가타가 정교 해지는 방향으로 즉, 과학적 엄밀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자연선택된 것 같다. 반면 동양에서 형태는 치(의미)가 정교 해지는 방향으로 진화의 선택압을 받았다. 중의적인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이다(동양적). 반면 표현의 중의성 모호성을 없애고 단 하나의 의미만을 남기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다(서양적). 예술과 과학 둘 중에 어느 것도 우월한 것은 없듯이 동양과 서양의 형태, 사고방식에도 우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한 가지, 나는 동양인이지만 동양의 형태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나는 동양의 형태가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내가 가졌던 종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어릴 때부터 동양의 미디어 콘텐츠보다는 서양의 미디어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동양의 문양과 상징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종교적 이미지와 복합적인 선들이 교차되고 그 패턴이 전체를 채우는 것. 흑과 백의 굵고 진한 선과 배경의 대비가 주는 강렬한 이미지. 원색의 배치. 특히 인도와 불교에서 나타나는 신들의 형상이 무서웠던 것 같다. 심지어 한자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형태마저도 그렇게 많은 철학과 깊이, 의미가 담겨있는지 몰랐다.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만 했던 동양적인 형태가 새롭게 보였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 책은 내가 읽어본 책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결을 가진 책이었다. 그 깊이가 심오해 구체적인 철학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관점들을 접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좋은 책은 독자를 책을 읽기 이전과는 다른 세상 속에 살게 한다. 예전엔 무심코 지나처 버릴만한 대상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세상에서 내게 형태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형태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각 문화권마다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지 궁금해졌다. 형태라는 개념에 대해 대한 깊이 있고 새로운 탐구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Reference:
형태의 탄생, 스기우라 고헤이, 안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