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메르 Sep 02. 2024

당신, 아직도 빛나고 싶나요?

40대에도 열심히 사는 이유

주말에 남편과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었는데, 남편은 나의 학교 생활이며 커리어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당신은 왜 아직도 빛나고 싶어 해?"

라고 물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일도 잘하고 싶어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내가 남편의 눈에는 더 잘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집중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남편은 항상 나에게 "하나만 해, 하나만."하고 말하곤 한다. 사실 남편이 원하는 한 가지는 내가 아이들에게 좀 더 집중하며 엄마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다. 남편의 항변은 자신은 사회생활에 더 최선을 다해서 잘 해낼 테니, 나는 육아와 가정생활에서 좀 더 힘을 쏟으며 각자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더 힘을 싣자는 것이다.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이 하는 이야기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어느 한쪽에 에너지가 쏠리면 다른 쪽은 어쩔 수 없이 힘을 잃는다. 특히 단순히 분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경우에는 그 에너지 분배의 차이가 더 큰 결과의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A와 B라는 일에 3대 7의 에너지를 분배해서 쓴다고 하면 1대 10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물론 반대로 3대 7의 에너지로 7대 3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분업이 효과가 있는 것은 그것이 기계적이고 자동화적인 일일 때이다. 일이 어느 단계를 넘어 좀 더 기술적이고 통합적인 사고를 요하는 수준이 오면 분업으로는 분명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생긴다. 육아 역시 단순히 아이를 배불리 먹이고 재우는 아주 기본적인 욕구들을 채워주는데 국한된다면 분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육아는 생각보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육아라는 것은 각각의 행위들이 통합적으로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명의 주양육자가 육아라는 큰 배의 선장이 되어 조타를 잡고 주도적으로 항해해 나가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며 각각의 상황에 대한 통합적 관리가 필요하다. 매번 다른 원칙을 적용하게 되면 육아의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또한, 한 사람이 내면적으로 온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사랑과 깊은 유대관계를 필요로 한다. 나무가 크기 위해서는 양질의 토양 위에 뿌리가 깊게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부모와의 관계는 나무가 뿌리내릴 토양과 같다. 이를 위해서는 오랜 시간 함께 하면 깊은 교류를 통해 신뢰관계가 차곡차곡 쌓여야 하는데 분업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물론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30분이라도 질적으로 아이와 시간을 잘 보내면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나도 정말 그렇게 믿고 싶다. 내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걸까? 육아에 대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이 안된다. 앞선 생각들은 늘 내가 육아를 '제대로'하고 있지 못하다는 안타까운 생각들도 귀결된다. 어쩌면 나의 완벽주의 때문일지는 몰라도 무엇인가를 몰입해서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은 이따금씩 내 마음을 힘들게 한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서 남편은 나에게 왜 빛나고 싶어 하냐고 물었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나는 빛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애써 빛을 잃지 않으려는 것에 더 가깝다. 나에게 너무 중요한 육아를 하면서도 사회인으로서 내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발버둥일 뿐이다. 엄마가 되는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육아에 몰입해 있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사라지고 '엄마'라는 정체성만 남는다. 너무나 예쁜 내 아이에게 기꺼이 내 시간, 내 마음, 내 노동을 바치다 보면 내가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아이는 커가면서 점점 독립해 가는데 오히려 엄마는 아이와 동일시된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나의 노력은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이 행복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동일화의 과정을 조금이나마 이겨보려는 행위이다.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내 전부가 아니라 사회인으로서의 나도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알려주고 싶다. 내가 일에 완전히 올인하지는 못해도 이렇게 틈틈이 공부하고 일하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오겠지, 내가 이 사회에서 필요되고 쓸모 있을 날이 오겠지라는 바람인 것이다.




가장 가까운 남편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과 엄마와 사회인의 정체성을 오가는 이 혼란의 감정을 같은 여자이자 엄마이자 워킹맘인 동지들이 아니면 어떻게 이해를 할까. 이런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면 '네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야'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하지 마'와 같은 반응이 나온다. 그럴 때면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나의 완벽주의에서 비롯된 것만 같다. 그러면 나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듯 애꿎은 비난의 화살을 남편에게 돌린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남성 위주의 조직 문화, 이 사회의 성별 불평등까지 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멀리까지 가게 되면 근본적이지만 해결될 수 없는 담론이 되어 버리고 대화는 하릴없이 종결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이 상황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것, 20대에 가져왔던 열심의 태도를 잃지 않는 것뿐인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나은 후배들의 상황을 위해 누군가와 이 경험과 감정을 나누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아니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너희의 길과 나의 길. 따로 또 같이.


이전 01화 아둘맘 대학원 졸업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