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제리와 양재도서관에 갔다. 나 혼자 양재천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싶었는데 제리는 굳이 따라가겠다며 킥보드를 끌고 굳이 나를 따라나섰다. 우리 집에서 양재도서관까지는 자전거로도 30분 정도 된다. 조금 귀찮기도 하고 혼자 후딱 다녀오고 싶었는데 어느새 제리는 이미 옷을 다 챙겨 입고 채비를 마쳤다.
조그만 발을 부지런히 구르면서 나를 따라오는 제리를 보면서 자꾸 웃음이 났다. 이 길을 혼자 달렸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이번 주 일어난 일을 복귀하거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애꿎은 페달만 힘차게 밟았을 것이다. 마치 인생을 달리듯이 그렇게. 그런데 날 따라 달리는 제리를 이따금 바라보면 제리는 웃는 얼굴로 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르고 난 열심히 따라오는 제리가 대견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해서 그렇게 마음이 한껏 채워지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이가 태어났을 때도 그랬다. 바라만 보아도 예쁜 꽃처럼 제이는 나에게 존재 자체의 기쁨이었다. 제이가 태어났던 그 해부터 제이는내 웃음유발자였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닌데, 제이의 얼굴만 봐도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제이가배냇짓처럼 살짝 앳띈 웃음을 머금으면 그 웃음이 내 얼굴로 환하게 번졌다. 나이를 먹고 현실에 퐁당퐁당 발을 넣을수록 마음이 시린 적이 많았는데, 아마 이 마음을 따뜻하게 유지하라고 신께서 제이를 보내주신 것 같았다.
직장에 나가거나 일을 하러 나가면 우리는 웃을 일이 별로 없어진다. ‘네모의 꿈’처럼 네모난 사무실에서 네모난 책상에 앉아 네모난 컴퓨터를 보면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표정도 네모네지고 생각도 네모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직장에서는 이렇게 웃음이 사라지는 걸까? 다들 웃음에 대해 일종의 공포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내가 몸담았던 회사의 경우에는 유독 그랬다. 오차와 실수가 없어야 하고 완벽해야 인정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케팅이라는 것이 화려하고 멋있는 무엇인 것 같지만 사실 그 본질은 숫자 싸움에 가깝다. 경쟁사를 제압함으로써 시장에서 성공하는 모든 지표는 숫자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숫자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으면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정확함은 신중함을 요구했고 신중함은 차분함으로 변모했으며 차분함은 때때로 지나친 무거움과 무기력함이 되었다.
젤로토포비아(Gelotophobia)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있다. 젤로토포비아는 다른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의미한다. “웃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los”아 “공포”를 의미하는 “phobia”의 합성어이다. 회사를 가보면 모두가 집단 젤로토포비아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이 웃음이 자칫 경박함으로 보일까 봐, 진중하지 못한 태도도 자칫 신뢰를 잃을까 봐 쉽사리 웃음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웃음에 대한 모종의 형벌이라도 받은 듯한 사회인들이 무장해제 되는 곳이 바로 자신들의 아이들 앞이 아닐까 싶다. 눈이 햇빛에 녹듯, 얼어붙었던 대지가 봄바람에 풀리듯 그렇게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내리고 미소가 절로 나온다.
아마도 이 팍팍한 세상에서 웃어내라고, 그렇게 살라고 하느님이 내려주신 것이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때로는 아이들 때문에 너무너무 힘들긴 하지만, 내게 웃음을 주는 것도 아이들이기에 오늘도 웃음유발자들과 이 어쩔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