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이가 여니에게
언어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언어로는 진리에 닿을 수 없다.
진리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에 대한 회고-
세상만사 진리에 대해 탐구하고 강의하는 사찰 강당의 현판이 ‘무설전(無說殿)’. 이맘 때면 불국사 무설전에서 말없이 현판을 보며 새겨 생각했던 어느 늦은 가을날이 떠 오릅니다.
티 나지 않을 것 같은 얄팍한 욕심이 사달을 내곤 합니다. 항암 중 면역이 약해지면서 구내염을 자주 앓습니다. 윗입술 가운데 부르터질 것 같은 포진이 흔적을 남기다 못해 입안으로 진행합니다. 포진 바이러스가 늘 같은 자리에 숨어 있다 면역이 떨어지는 방심의 순간에 올라오는 것이라 하더군요. 마치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의 역습처럼.
같은 듯 다른 듯, 가을마다 생각은 돋습니다.
올 가을을 남겨 두는가 고스란히 흘려보내는가. 참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직 욕심이라는 것이 오장육부 주름진 구석 어딘가에 박혀 있을 터. 변하는 척하다가 제자리로 오는 놈이 더 더러운 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저앉은 그날의, 그 처음의 생각을 다시 꺼내 봅니다.
그나저나 입가에 부르튼 포진의 원인은 세상과의 오랜 접촉 공백으로 면역이 저하된 것이라 자가 진단해 봅니다. 면역 과잉 질환자가 한편 면역결핍이라니. 양달이 있으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응달이 있다는 것을 떠 올립니다.
개인이나 세상이나 '진짜 균형'이 절실한 요즘입니다. 세상이 다시 제대로 굴러가서 제대로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마음의 입술이 부르트지 않게 말입니다.
그간 넘치도록 많은 말을 지어 내며 살았음을 고해하게 되는 그 어느 날 가을의 사진첩.
말이 없어도 진심이 전달되는 날을 살고자 속으로 다져 생각해 봅니다.
-곰탱이 남편의 어여쁜 아내와 나누는 아침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