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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26. 2024

스테파노 축일입니다

순교자에 대한 단상

오늘은 제 세례명이자 필명인 수호성인인 스테파노 축일입니다.

첫 순교자로 알려진 스테파노라는 본명은 모친께서 저를 사제로 봉헌하고자 김수환 스테노 추기경처럼 의로운 사제가 되라고 정해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사제가 되기는커녕 자본을 열심히 수호하다 병든 아들과는 절연했던 모친은 오늘도 자신만의 나름의 기도를 드리고 있겠지요.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아침, 1-2년 전 나눈 스테파노 이야기로 시작해 봅니다.


그림= <성 스테파노의 순교>, Giorgio  Vasari 1571


1.

신앙이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을 ‘순교자’라 칭합니다. 순교의 지칭이 확대 비유되어 퇴색되기는 하였으나, 원조인 신앙의 측면에서 그리스도교 초대교회와 한국 초기 천주교 순교자의 믿음은 놀랍기만 합니다. 신념을 위해 생명과 양자택일 중 신념을 선택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면 내 도량으로 이해하기 힘든 영역입니다.


2.

순교는 종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타살이나 자살이나 같은 범주에서 순교로 논합니다. 다만 그리스도교가 진화하면서 ‘자살’을 금기시하기에 이슬람교나 불교와는 달리 ‘자살자’에 대한 순교의 인정은 박합니다.


초기 그리스교에서는 메시아 예수 논쟁으로 같은 뿌리인 유대교인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고, 한국의 천주교 박해는 종교의 탄압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쟁점이 복잡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3.

순교에도 가짜와 짝퉁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 행하여지는 가짜 순교가 그러하고, 과격한 집단에서 정당화하는 자살테러도 순교로 포장되곤 합니다.


이견들이 있겠지만, 한국 개신교의 목사 1호 순교자는 1866년 조선을 약탈하러 들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 선교사 토마스 목사입니다. 약탈자를 응징하던 평양 백성들에게 맞아 죽음으로 순교자가 되고 기념 교회까지 세워졌습니다.


적폐들의 하수인을 하다 자괴감에 스스로 몸을 던진 예비역 장군이 ‘순교자’라 칭해지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4.

“순교자는 노력 없이 유명해질 수 있는 방법이다"
-버나드 쇼-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다고 모두 순교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충분조건은 대중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죽음’이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공감할 수 없는 신념에 대한 믿음과 죽음은 ‘광신’, 그 이상 아닙니다.


광기와 믿음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습니다.


5.

장황한 순교에 대한 잡설을 끄적인 이유는 오늘이 초대교회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축일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첫 일곱 부제였던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파하다 유대교인 군중들에게 돌을 맞아 죽음 당하여 첫 순교로 명하여졌습니다.


예전 성당에서 각자의 세례명으로 성명학의 그것처럼 성향을 분류하곤 했는데, ‘스테파노’는 묵묵한 일꾼, 성실한 원칙주의자로 분류되곤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두고 세례 성인의 축일로 말하기도 했는데, 교회와 세속의 큰 축제인 성탄절이 끝나고 모두 숨 고르기 하며 송구영신을 준비하는 썰렁한 날 12월 26일에 축일이기에, 축일을 챙겨 축하하는 사람은 또 다른 ‘스테파노’들이어서 그렇다 자위하곤 했습니다. (사실은 인기가 없는 성격이어서...)


6.

이제 미사도 항상 거르는 비자발적 냉담자가 된 나의 세례명이 ‘스테파노’입니다. 부모님이 내 세례명을 정한 이유는 딱 한 가지 ‘김수환 스테파노 같은 선한 사제가 되어라’하는 염원에서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까지 고민하다 내 길이 아니라 확신이 들어 지금의 나로 살아왔습니다. 그러길 잘했다고 늘 생각이 듭니다.


바보 김수환 추기경을 어릴 적 옆에서 네 번 정도 뵈었습니다. 세 번은 각종 축성, 견진 미사에서 향잡이, 예절지기 복사로서 봉헌에 함께했고, 한 번은 사생대회 입상하여 그분의 무릎에 앉아 사진 찍었던 9살 어느 날이었습니다. 자정미사를 봉헌하는 직전 추기경을 보다 그분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분의 성탄미사는 늘 구룡마을 판자촌이나 소록도 한센인 마을 등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였는데, 지금의 교회는 신자도 아닌 정치인을 제일 앞자리에 앉힌 명동에서의 연례행사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7.

휴대폰이 없을 적 친구들이 전화하면 모친은 전화받으러 나를 부를 때 늘 고상하게 외치셨습니다.

‘스테파노~ 전화받아~’

부끄러움과 해명은 내 몫이 되었습니다. 평소 내 대명사는 ‘야!’였는데 말입니다.


부끄럼 타던 순수했던 스테파노가 그립습니다.


8.

나름 잘 버티었다 생각했던 날들이 함께 버티어준 아내에게는 지옥 같은 날들이었나 봅니다.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체하던 날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아픔까지 이해하고 사랑하기로 합니다.


다시 삶의 시간을 얻어 기도가 필요해졌습니다.

나만이 대충 사는 삶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스테파노’로 돌아가는 그런 스테파노 축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 단 한 사람을 위해 목숨 아까워하지 않는 순교자의 마음을 품어 봅니다.

작고 미천한 삶이지만 상식과 양심이란 신념에 굴하지 않는 작은 ‘스테파노’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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