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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

사순묵상 03

by 박 스테파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독일어로 '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라는 뜻의 단어다. 'Schaden'은 손해, 손실 등을 뜻하고 'Freude'는 기쁨, 환희 등을 의미한다. 독일어의 조어의 확장성으로 한 문장을 한 단어로 만들었다. 영어에 마땅한 대체 단어가 없어 독일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직역하면 '손실로 인한 기쁨' 정도다. 정확히 인의 손실.


일본어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속어지만, 이런 심리를 가리키는 '메시우마(メシウマ)'라는 표현이 있다. '밥맛이 좋다'라는 맥락에는 남의 불행으로 인해 밥 맛이 좋다는 뜻이 숨어 있다. 우리말도 '꼴좋다', '속 시원하다'라는 평가적 표현들은 있다. 그러나 일어나 우리말 모두 독일어의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대체할 단어는 마뜩지 않다.


이 감정은 시기와 질투의 증폭 확장판과 같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넘어 저주의 심리가 스며들어 있다. 긍정의 칭찬과 호평을 할 때 보다 헐뜯고 폄훼하는 비난을 할 때 뇌는 더 큰 자극을 받는다고 한다. 이 자극은 질투와 시기를 넘어선 지 오래다. 딱히 질투할 대상도 아닌 제삼자의 불행을 보고 그의 인생 서사를 마음대로 각색해 품평하는 것은 흔한 일상이 되었다. 자극에 길들여 우리는 어느새 '불행 천국'의 시대 한가운데 들어 선지도 모르겠다.


방송ㆍ콘텐츠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넘쳐난다. 일종의 관찰 교정 예능이라는 프로그램이 그 전형이다. 오은영 씨의 금쪽이는 이미 스테디 한 콘텐츠가 되었고, 이혼 숙려라는 이름으로 가정, 부부의 불화를 보며 더 자극적 막장을 기대한다. 스크린 안의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어진 인생과 우주는 알 바 아닌 게 되었다. 손가락질과 혀끝차기만 허용되는 내 마음속의 콜로세움이 세워진다. 자신의 삶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의 격투를 보며 그저 죽여라 살려라 판단하길 즐길 뿐이다. 온라인상에선 어떤가. 앞 뒤 맥락 없이 thumb up과 thumb down을 척척 해대기 바쁘다. 우리 모두.


트리나 폴러스 <꽃들에게 희망을>. 1972


세상은 누가 나보다 더 불행한지를 보고 위안을 삼는 심리의 위약(플라세보)이 넘치는 시대가 되었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연민하며 연대의 용기를 내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숨어들었다. 주일날 십일조와 함께하는 통성 기도 때만 가능한 크리스천들이 천국행을 바라는 요행의 시대다.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으로 돋보이고 배가되는 것 같으니까. 세상 모두의 행복은 바라지 않는 것이 당연한 세상 아니던가.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이 있다. 삶이라는 게 대부분은 비참하고 부침 가득한 불행의 연속이라는 진실 말이다. 그 불행의 깊은 산속에서 아주 이따금 스며드는 바람과 햇볕에 행복을 느끼고, 내 삶은 대체로 행복했다 억지 기억 세우고 사는 게 삶 아니던가. 누군가는 내 허덕임과 비루함을 보고 행복을 느낄지도 모른다. 내 추락과 실패는 누군가의 기쁨과 희열이 된다는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알 수 있는 일. 그렇게 오욕과 질투의 탑을 쌓으며 하늘로 오르려 서로를 밟고 쓰러지는 애벌레들의 아우성 같은 날들에 희망은 있을까.


자신의 몸을 회심과 사유의 고치로 말아 번데기가 되는 법을 깨닫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나 싶다. 그래도 아주 적은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우주를 고치 속에서 품어 내어 한 마리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이 사순의 회개가 아닐까. 꽃들에게 희망이 되는 나비를 꿈꾼다. 내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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