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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선의 결여

사순묵상 02

by 박 스테파노
미덕은 진정으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이고, 악덕은 무지의 결과다. 따라서 선을 알게 되면 당연히 행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명제가 등장한다: “아무도 알면서 악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흔히 선과 악을 서로 대립하는 존재, 즉 양 극의 대립자로 여기고 산다. 백색 날개의 천사가 선이라면 검은 뿔과 꼬리의 악마는 악이라는 식의 정념적 소산이다. 이 대립된 개념으로 자리 잡은 선악의 구분은 거짓에 가깝다. 만약 이를 종교인이 말한다면 그는 사이비일 확률이 높다. 스스로 인지하던지 못 하던지 말이다. 초대 교회 시절 마니교 같은 사이비가 만든 개념이 선악의 대립이었다. 이는 오류라기보다 무지에 가깝다.


플라톤주의와 유사하지만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 선은 절대자로 정립한다. 절대자라는 것은 그와 비교할 비교 대상, 혹은 반대의 개념인 대립자도 존재할 수 없다. 유일신 신앙의 신이 절대자이자 절대 선이라는 개념이 종교의 근원 도그마가 되었다. 따라서 '선의 반대말은 악'이라는 개념은 거짓이다. 적어도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그렇다면 악은 무엇일까? 악은 '선의 결여'를 말한다. 있어야 할 선이 사라지고 부존 하는 상태 자체가 악이다. 소극적인 해석이라는 반론이 가능하지만, 오히려 깊게 확장된 해석이다. 이 해석으로써 세상의 악은 통념보다 더 넓게 규정된다. '하지 않음'과 '이루어 내지 못함' 자체가 악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형을 유대인들 여론에 맡긴 빌라도처럼 하지 않은 것 자체가 악이다.


이 말을 집어 들면 비로소 한나 아렌트의 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이해 가능해진다. 선의 작용이 무엇인지 분명한 상황에서 이도 저도 아닌 판단을 유보하는 일은 '선의 결여'가 분명하며 그 자체로 악행이 된다. 신약의 그 흔한 일화 '착한 사마리안의 비유'는 사랑의 교리 이전에 선의 결여가 곧 악이라는 신의 도그마를 말한다.


* 그림= '상처입은 천사', 휴고 짐베르, 1905

하지 않음 자체가 결여의 원인이라면 악이다. 지금 임시 권력자의 판단 유보는 적극적 거부권과 다름없는 악행이다. 또한 상식과 양심이 결여된 상태를 악이 지배한 상태라 여긴다면, 지금을 진영의 갈등, 두 정념의 갈등으로 이야기하는 모두는 악의 공동정범이다. 그를 몰랐다 말하는 무지의 변이야 말로 악인들의 습관적인 변명이다. 악덕은 무지의 결과다.


아직 혼란스럽고 걱정 가득한 날들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확한 판단과 이해가 필요하다. 판단의 근거는 결여의 여부다. 상식과 양심이 결여된 모든 것이 악행이다.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결여된 존재들에게 자각과 회심을 촉구하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짜 계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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