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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번째 낙타의 꿈

사순묵상 07

by 박 스테파노 Mar 18. 2025

사막 끝자락에 붉은 석양이 지던 날, 세 형제는 아버지의 유언장 앞에서 침묵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그들의 건조한 입술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장남 카림이 유리병 속 양피지를 꺼내 펼쳤을 때, 썩은 가죽 냄새가 공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남긴 낙타 17마리를 장남은 1/2,
차남은 1/3, 삼남은 1/9로 나누되...'


"이게 무슨 농담이지?" 차남 나딘이 양피지를 내던지려는 손을 삼남 사미르가 잡았다. 막내의 손가락이 형의 팔뚝에 파고들었을 때, 장작더미처럼 쌓인 낙타들이 멀리 사구 뒤에서 울부짖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모은 귀중한 재산이 이제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수로 변해버린 듯했다.


열흘 밤낮을 논의한 끝에 결국 그들은 오아시스의 현자를 찾아갔다. 백색 로브를 휘날리며 모래언덕을 내려오는 노인의 발아래서는 한 마리 황금빛 낙타가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삼남이 말을 시작하자 노인이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그들이 모래 위에 숫자를 새기기도 전에, 현자는 이미 열여덟 번째 낙타를 무리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제 나누어 보게."


형제들은 다시 유언대로 낙타를 나누어 각자의 매듭에 묶어 내었다. 9마리, 6마리, 2마리. 아버지의 유언대로 각자의 몫을 챙기자 현자의 낙타만이 흙더미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제 이 친구는 돌아가야 하네." 노인이 낙타의 귀를 어루만지자 동물이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세 형제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황금빛 낙타는 마치 모래로 빚어진 존재라도 된 듯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모여든 어둠 속에서 카림은 남은 낙타들을 바라보았다. 17마리. 완벽한 숫자. 그러나 이제 그 무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열여덟 번째 존재가 영원히 자리 잡고 있음을 그들은 느꼈다. 아버지의 마지막 숨결이 각자의 어깨에 내려앉는 것을 보며, 그들은 비로소 유산이 아닌 유언을 물려받았음을 깨달았다.

낙타의 비유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사진=월간동아


(탈무드 이야기를 단편 구성해 보았다.)


제법 알려진 탈무드의 이야기 중 하나다. 탈무드의 열여덟 번째 낙타 이야기는 잘 알려진 만큼 여러 층위로 다층적 의미 분석이 가능하다. 단순하게 수학적, 경제학적으로 보아도 각자가 산수로 나눈 몫보다 더 가져가기에 손해가 없다. 모두 플러스 이익을 가져가게 된다. 이는 우리 모두의 이익이 곧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이라는 공리주의적 경제관에 닿아 있다. (8.5마리의 장남은 9마리, 5.67마리의 차남은 6마리, 1.89마리의 삼남은 2마리)


또한 사회학적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공동체의 협력과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인해 발생한 17마리의 낙타 분배 문제는 개인의 이기적 계산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를 드러낸다. 그러나 현자가 자신의 낙타를 일시적으로 추가함으로써 문제를 재구성하고, 형제들은 합리적 분배 후 남은 낙타를 반환하는 과정에서 상호 신뢰와 외부 중재자의 역할이 결정적임을 보여준다. 이는 사회 갈등 해결에 있어 제3자의 객관적 관점과 유연한 규칙 적용이 필요함을 시사하며, 개인적 이익보다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우선시하는 집단 지혜의 가치를 강조한다. 요즘 찾아보기 힘든 '어른'의 역할이 중요하다.


철학적 의미에서 이야기의 핵심은 문제 해결의 틀을 재정의하는 유연한 사고에 있다. 숫자 17에 매몰된 형제들과 달리, 현자는 낙타의 총량을 18로 변형함으로써 불가능해 보였던 분배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고정된 규칙이나 외부 조건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창의적 관점으로 현실을 재해석하는 철학적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18번째 낙타"는 해결책이 문제 내부가 아닌 외부에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역설과 모순을 수용하는 변증법적 사유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마지막 문학적 의미로 보는 이야기는 상징과 은유를 통한 교훈 전달의 전형을 보여준다. 낙타는 물질적 재산을 넘어 갈등의 대상이자 해결의 매개체로 기능하며, 숫자 18은 완전성(유대교에서 18은 '생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חַי'의 숫자값)과 가능성의 상징으로 읽힌다. 서사 구조는 '계산적 합리성의 한계 → 비합리적 개입 → 역설적 해결'이라는 역설적 흐름을 통해 독자에게 인식의 전환을 유도한다. 이는 문학이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알레고리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완성하는 동시에, 단순한 교훈을 넘어 인간 사고의 다층성을 탐구하는 서사적 가치를 구현한다.


글쓰기는 유행을 넘어 사유의 반석이 되었으면. 사진=게티이미지코라아


탈무드의 이야기를 최근에 다시 읽고 든 생각이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열여덟 번째 낙타를 채우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요즘은 '성급한 확신'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시대다. 정보의 홍수라는 말에서 모든 것이 말해주듯 넘치는 것을 넘어 범람해 밀려드는 물길은 쓸데없는 부유물과 퇴적물을 가지고 올뿐이다. 건져낼 것은 없고 오히려 내 소중한 공간마저 그 흙탕물에 젖어들기 십상이니 홍수는 반길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정보의 홍수도 마찬가지다. 내적 역량과 지식의 혜량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진위를 가리기 힘든 정보와 뉴스들이 밀고 들어온다. 자본과 기술의 알고리듬은 이 틈을 파고들어 나의 어설픈 확신이 켜는 깜빡이 쪽으로만 지도를 펼쳐내는 선택적 내비게이션이 된다. 어느새 편향된 아집은 확신이라는 고결한 단어를 오염시키고, 복잡하지만 항상 옳은 내가 단순하게 모자란 너희들을 나무라는 말과 글을 섞어 잡히지도 않을 자존감을 세울 뿐이다.


확신의 전염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춤의 용기다. 잠시 멈추어 판단을 유보하고 정보의 바닥까지 관찰하고 사유하는 일. 이런 일은 시간이라는 대가와 편견이라는 저항에 마주하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 내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공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내적 분투의 외현이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 시류에 맞는 이야기를 빠르게 말처럼 써 대는 요즘에 깊은 사유는 희귀한 무엇이 되었다.


잠시 멈추어 인문학적 전환과 재해석을 위한 조력이 필요할 때, 누군가 열여덟 번째의 낙타를 내어 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군가, 현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생각의 깊이로 낙타를 내어 준다면 세상은 그래도 견딜만하지 않을까. 열여덟 번째 낙타를 빚는 마음으로 잡글들을 쓴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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