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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Oct 12. 2017

어려운 말이 없어야 잘 읽힌다

다르게 쓰고 싶은 온라인 편집숍 카피라이터의 고군 분투기 

글 쓰는 일이 본업이 되기 전 나는 편집디자이너였다. 전공은 가구 디자인이었고 편집디자인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이 약 3개월간 급하게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회사에 취직했는데 일을 하면서 편집디자인이 더 좋아졌다. 야근을 해도 밤을 새워 작업해도 행복한 건 그때가 유일했다. 누군가 나에게 넘겨준 자료를 정리 정돈하는 느낌으로 보기 좋게 배치하는 일이 참 맘에 들었다. 그땐 그 일이 내 평생 직업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론이 길었는데, 앞서 말했듯 어깨너머로 배운 편집디자인이라 인쇄할 때 사용하는 팬톤 컬러칩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땐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창피해 대충 아는 것처럼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색채 언어라고 알려진 팬톤 컬러는 디자인, 건축, 패션, 산업 등 다방면에서 색채의 기준,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레드도 그렇게 많은 레드가 있는지 회색도 그렇게 다양한 회색이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워낙 아이템의 가치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에 이를 응용한 제품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29CM에도 팬톤 시리즈라고 하여 다양한 제품이 판매되고 있는데 오래전 읽은 일본 소설을 다시 보다가 팬톤 브랜드에 적용하면 좋을 문장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한 가지 상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어필하는 카피로 사용해볼까 한다. 


소설 속 문장:

그것으로 나의 생활은 새로운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인물과 미끄럼틀과 태양만 색칠한 그림에 배경이 펼쳐진 하늘을 다 칠한 느낌. 

<테마 소설집 LOVE OR LIKE 중 나카무라 코우의 ‘허밍 라이프’ 중에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끔 사용되는 기법이다. 주변은 흑백이고 인물만 컬러였다가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거나 사랑이 이뤄지는 순간 흑백이던 주변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드는 장면. 글을 쓰다 보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뻔한 상황인데 문자로 표현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소설가의 표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곤 하는데, 자질이나 능력은 대단한 것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얼마만큼 이해하기 쉽게 글로 표현해 내느냐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이처럼 문장만 보고도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기가 막상 써보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제와 똑같은 하늘의 구름도 하트 모양으로 보인다거나 시끄럽게 아침잠을 깨우던 새소리도 아름답게 들리지 않던가. 생활이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는 건. 아마도 그런 상황일 것이다. 무채색이던 내 일상이 컬러풀하게 바뀐다고 생각해보자. 죽어있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날 것만 같다. 


완성 카피:

명도만 다른 회색 도시에 

나무와 미끄럼틀 눈부신 태양과 드넓은 하늘까지 

색을 다 칠한 느낌 (상단이 서브 타이틀)


나의 생활은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From PANTONE (하단이 메인 타이틀)


문장에서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맘에 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쓰는 단어만으로 얼마든지 귀에 쏙 들어오는 카피를 쓸 수 있다. 이것은 소설이 주는 장점이기도 하다. 소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어려운 말이 없다는 점에서도 다양한 소설을 꾸준히 읽고 작업에 응용해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팬톤의 상품이 대부분 생활용품임에도 불구하고 전면에 그런 점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 전반이 바뀐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문장이 팬톤 브랜드를 어필하는 카피에 적합하다. 카피라이터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 카피를 쓸 때 머그컵이나 쟁반 같은 단어를 넣어서 바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소설이 가진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카피에 응용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메인 타이틀과 서브 타이틀의 순서를 바꿔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보통은 메인이 위에 올라가지만 이번에는 서브를 위에 두고 두둥, 하는 느낌으로 메인 타이틀을 적어줬다. 바꿔도 큰 문제는 없지만 임팩트가 있는 쪽은 역시 메인 타이틀을 나중에 써주는 거다. 테마 소설집 LOVE OR LIKE는 기대하지 않고 봤던 책이었는데 의외로 좋아서 두고두고 읽고 있다. 여러 작가의 소설이 아기자기하게 실려있다. 약속 시간에 미리 도착한 날 따뜻한 밀크 티 한 잔 시켜놓고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한 편을 다 읽었을 때쯤 그가 도착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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