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미 Oct 05. 2017

빼앗고 싶은 소설가의 묘사력

다르게 쓰고 싶은 온라인 편집숍 카피라이터의 고군 분투기

요즘 출퇴근 길에 읽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손바닥만 한 문고본으로 읽고 있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무게와 파란색 테를 두른 표지가 추운 날씨의 종종거림과 하얀 입김에 잘 어울린다. 볼이 시리고 귀가 얼 정도의 날씨에 매우 잘 어울리는 책이기도 하다. 큰 맥락없이 풍경을 묘사한 글이라 그런지 읽는 내내 자주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바라보게 된다. 책 속의 설국과 내 피부에 닿는 서울의 겨울을 번갈아 가며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빠져나간 오늘 아침 서울도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만으로도 눈앞의 하얀 설경이 펼쳐지는 듯하다. 묘사가 두드러지는 소설인 만큼 인물들에 대한 외적인, 심적인 묘사 또한 세밀하다. 소설이 카피 쓸 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것을 보고 써주는 디테일. 물론 이런 용도로 쓴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소설 속 문장:

여자의 인상은 이상할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밑의 옴폭진 곳까지도 깨끗할 것 같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중에서>

‘발가락 밑의 옴폭진 곳’ 여기만 읽어도 발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지 다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이 특히 깨끗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마저 깨끗할 것 같다는 건 얼마나 깨끗해 보인다는 뜻일까? 하얗다 못해 투명한 여인의 살갗과 뾰루지나 각질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가 눈에 선하다. 오래전 에세이에도 한번 썼듯이 나는 발 각질에 유독 관심이 많은 여자로서 겨울철이면 각질과의 싸움에 늘 지고 만다. 외할머니 때부터 엄마, 그리고 나까지 우리 집안 여자들은 모두 발뒤꿈치 각질이 좀 있다. (이것도 유전이란다) 그래서 늘 풋크림을 바르고 또 바르고 틈 날 때마다 물에 불려 각질을 미는데도 쉽사리 좋아지지 않는다. 유전의 힘이란…


완성 카피:

그녀 발가락 밑 옴폭진 곳에

손가락을 넣어도 향기만 묻어날 뿐

부드럽고 고운 발을 위한 풋크림


평소 잘 표현하지 못하는 신체 부위라는 점이 이번 카피의 묘미였다. 발가락 밑의 옴폭진 곳을 손가락으로 쓸어도 때가 아니라 향기만 묻어난다. 이거야 말로 소설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디테일 아닐까? 우리가 흔히 깨끗함을 드러낼 때 자주 쓰는 얼굴, 손, 머리카락 등이 아니어도 진짜 청결을 나타낼 수 있다는 또 다른 묘사의 매력도 배울 수 있다.


뻔한 카피가 되지 않기 위해선 시도하지 않았던 표현을 자꾸 써봐야 한다. 하다 못해 이런 하찮은 신체 부위도 좋은 소스가 될 수 있다. 나 또한 소설을 읽으며 그런 점은 많이 배우고 있다. 언젠가 소설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런 표현력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전 11화 쓰레기통을 파는 카피에는 쓰레기통이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