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쓰고 싶은 온라인 편집숍 카피라이터의 고군 분투기
야근은 힘들다. 힘들지만 가끔 하는 야근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행복에 겨운 소리인지 몰라도 나는 야근을 끊은 지(?) 참 오래됐다. 끊었다는 표현이 좀 이상한데, 어느 순간 야근과 거리가 멀어졌다. 가장 큰 요인은 아이를 임신하면서부터다. 회사의 복지가 잘 되어 있고 동료 직원들의 배려 덕에 눈치 보지 않고 정시 퇴근할 수 있었다. 물론 요즘은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는 이유로 야근은 더 멀어졌다.
근데 (좀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야근이 그립다. 편집디자인을 하던 시절에는 결혼도 안 했고 당연히 아이도 없는 자유의 몸이니 야근이 편했다. 일이 너무 많은 건 힘들지만 저녁밥도 해결되고 일을 다 마친 뒤 동료 몇몇과 맥주도 한 잔 하고 들어가는 그 맛이 있었다. 그땐 출근하면 아예 집에 일찍 갈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다. 가족 모임이나 약속이 있지 않는 한은 회사에 있는 게 덜 심심하기도 했고… 가장 큰 요인은 지금에 비해 일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컴퓨터는 또 왜 그렇게 느린지 디자인한 거 저장이라도 할 나치면 저장하다 컴퓨터가 뻗는 건 흔한 일이다.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저장이다!) 그러면 작업이 날아가고 날아가면 다시 해야 되고 그러면 또 야근이고… 글을 쓴 다음부턴 웬만해선 저장이 안돼 작업 파일이 사라지는 그런 사고는 없어 한결 맘이 편하다.
좋아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단편소설 ‘조중균의 세계’는 조중균이란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을 통해 직장 생활을 리얼하게 쓴 김금희 작가의 작품이다. 단어의 쓰임이나 상황 표현이 매력 있어(너무 내 취향) 심심할 때마다 들춰보는 소설이기도 하다. 읽을 때마다 밑줄 긋는 포인트도 다르고 키득거리는 포인트도 다르다. 내가 이 소설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어딘가 이런 사람이 꼭 있을 것 같아서이다. 직장 생활을 해봤다는 작가의 과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교정작업을 꽤 오랫동안 해 온 조중균 씨는 말수가 적고 점심을 먹지 않는다. 화자는 그가 친화력이 없어 직원들의 따돌림으로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어 그런가 보다 했으나 알고 보니 그는 자발적으로 점심을 안 먹는 거였다. 그 이유 또한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구내식당이 있는데 왜 점심을 안 먹냐는 질문에 구내식당에서도 밥을 먹지 않으면 한 달에 9만 6000원을 돌려준다는 말에 ‘나’ 또한 적지 않은 돈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회사에 아직까지 이런 사례가 없어 점심을 먹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매일 식당 앞에서 본인이 만든 수첩에 부장의 사인을 받는 등 그의 독특함은 흥미롭고 애잔하다. 단편소설은 플롯도 중요하지만 캐릭터가 참 중요하다는 걸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깨닫기도 했다. 짧은 페이지 안에서 인물의 특징을 대사나 행동 묘사로 얼마나 잘 표현하는 가에 따라 글의 완성도가 달라진다. 이 소설에 나오는 몇몇 등장인물은 각기 캐릭터가 매우 뚜렷하다.
워낙 일독을 권하는 소설이다 보니 얘기가 길어졌다.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상품은 스탠드 조명이다. 그러니까 책상이나 테이블에 올려두고 사용할만한 조명인데, ‘조중균의 세계’를 보면 조중균 씨가 야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도 과거의 나처럼 야근을 그다지 싫어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홀로 남아 작업에 집중할 수 있어 그 시간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가길 기다렸다가 사무실 형광등을 모두 끄고 자신의 책상 조명만 남겨둔 채 교정 작업을 시작한다.
소설 속 문장:
조중균 씨는 매일 야근했다. 하루에 겨우 예닐곱 장의 교정지가 넘어올 뿐이라서 정작 나는 정시에 퇴근했다. 내일 봐요, 하고 내가 사무실을 나가면 조중균 씨는 일어나 자기 자리만 남기고 사무실 형광등을 모두 껐다. 그리고 그런 사무실의 어둠을 아주 따뜻한 담요처럼 덮고 원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중에서>
‘나’가 내일 봐요, 하고 사무실을 나갈 때 조중균 씨가 조용히 책상 의자를 밀며 일어나 검은색 슬리퍼를 끌며 걸어가 형광등을 끄고 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이 그려진다. 사무실에 내려앉은 어둠은 더 이상 어둠이 아니라 담요 같은 따뜻함이다. 이 장면만 읽어도 화자가 느끼기에 조중균 씨가 교정 작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책상 조명에 의지한 채 사전을 들춰가며 몰입하는 모습이 따뜻한 담요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따뜻한 담요라는 건 어떤 걸 의미하는가? 그건 힘든 게 아닌 긍정적인 모습, 즐기는 현상을 말한다.
절약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겠지만 스탠드 조명만 켜고 일하면 집중이 잘 되는 기분이 든다. 나 또한 과거 밤늦게까지 작업할 땐 책상 조명에만 의지한 채 일하곤 했는데 그 나름의 운치가 아직도 생생하다. 뭔가 나 혼자 ‘열일’하고 있다는 아우라를 풍기는 것도 나쁘지 않고.
늘 그렇듯 상품을 팔 때 그 상품에 대한 새로운 기능이 있다면 그 기능을 살려서 카피를 적어주는 게 맞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상품(조명)일 경우 사용한 다음의 분위기를 어필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럴 때 활용하면 좋은 게 바로 소설이다. 왜냐하면 부족한 표현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완성 카피:
OO스탠드를 켰더니
공간은 어둠이란 따뜻한 담요를 덮었다
공감 가는 문장을 쓰기 위해선 나 또한 공감력을 키워야 한다. 즉 누군가의 글에 잘 반응해야 된다는 뜻이다. 물론 책을 많이 읽으면 그런 능력은 자연스럽게 키워진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는 건 알아두면 좋을 정보일 때도 있지만 나처럼 내가 겪은 상황, 감정, 행동과 비슷해서일 때도 있다. 그러니까 그런 문장을 볼 때 흡수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맞는 저자, 문체, 취향의 책을 찾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런 책을 찾아 꾸준히 읽어야 한다. 나는 어떤 작가의 책을 읽고 나서 꽂히면 그의 전작을 역순으로 모두 사서 읽는다. 간혹 실패하는 책도 있지만 그렇게 팬이 되기도 한다.
김경 칼럼니스트의 에세이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에 이런 문장이 실려있다.
형광등 아래서는 모든 것이 명백하게 추해 보인다.
하지만 촛불 아래서는 모든 것이 어슴푸레 아름답다.
삶이 드라마를 가지지 않는 때조차.
소개팅한 날 상대 남자가 맘에 들면 절대 가지 말아야 할 장소가 편의점인 것처럼 형광등은 숨김없이 모든 걸 보여준다. 들뜬 화장, 저녁때 올라오기 시작하는 뾰루지, 번들거리는 기름기까지. 반면 어슴푸레해서 은은한 촛불은 사람을 아름답게 보이게 할뿐더러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은 과감히 어둠에 묻히게 만든다. 촛불과 스탠드 불빛이 비슷하지 않을까? 나에게서 시작된 빛이 점점 줄어드는 밝기에 나는 괜히 따뜻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힘들게 야근하는 밤조차 어떤 드라마가 생길 것처럼 기대하게 만드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