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미 Nov 23. 2017

술자리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들

다르게 쓰고 싶은 온라인 편집숍 카피라이터의 고군 분투기

언뜻 보고 지나쳤지만 잘 잊히지 않는 문장이 있다. 계속 신경 쓰이고 여러 번 생각하게 된다. 작년 초에 읽었던 윤대녕 작가의 ‘피에로들의 집’은 장편소설로 큰 울림을 줬던 소설은 아니었다. 다만 읽는 동안은 흥미롭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던 것 같다. 중간중간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 많아 밑줄 긋고 따로 필사해 두기도 했다. 그중 이 술에 관한 문장은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소설 속 문장:

그래, 술은 낮을 잊게 하고 밤은 과거를 불러오지.

<윤대녕 ‘피에로들의 집’ 중에서>


요즘은 맥주가 참 좋다. 그중에서도 칭X오의 매력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좀 밍밍한 게 나랑 맞는다. 그래서 술술 잘 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퇴근하는 길 집 앞 마트에 들러 맥주 6캔 세트를 사서 둘레둘레 들고 갔다. 술, 하면 할 말이 참 많다. 멋 모르고 겁 없이 마셨다가 입원해야 할 정도로 간이 많이 상했다. 그 뒤로 좀 자제하긴 했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를 너무 좋아해서 쉽사리 끊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딱 그 시기가 오고 말았다. 술이 써지는 때. 독주가 싫어지는 때 말이다. (그래서 소주가 힘들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술 마신 다음 날 회복 능력도 점차 떨어지고 해독(?)도 늦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술이 즐겁기보다 고달파지는 거다. 이러니까 굉장한 술고래 같지만 사실은 잘 못 마시는 축에 든다. 다만 술자리를 좋아하고 알딸딸하게 취했을 때의 기분을 못 잊는다. 좀 취하면 머리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바로바로 한다. 가슴에서 시키는 말을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냥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취중진담이란 말이 나왔겠지. 싸움도 많이 하지만 그러자고 술 마시는 것도 없지 않은가. 


과연 술은 낮을 잊게 하고 밤은 과거를 불러오는가. 이 문장을 굳이 (내 방식대로) 해석하자면 밤에 마시는 술이 낮을 잊게 하는 건 맞다. 우린 주로 술을 밤에 마시고 (물론 낮술이 그렇게 맛있다지만) 그렇게 마시는 술은 옛날이야기를 꺼내게 만든다. 헤어진 연인에 대해 말하고 잘 나가던 때를 회상하고 그리운 사람을 언급한다. 우리나라에서 술을 팔고자 하는 카피를 써야 할 때 주로 그 술이 가진 고유의 맛이나 만드는 방식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 광고에서는 좀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산토리 위스키의 광고 중 이런 카피가 있다. 


"저 사람도

한잔해보면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이 인쇄 광고의 이미지는 매우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있다. 체격도 어마어마해서 마치 스모선수를 방불케 하는데, 그런 사람도 한잔 해 보면 의외로 부드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술이 그걸 증명해줄지도 모른다는 카피다. 어떤 제품에 대해 고유한 특징을 내세우기보다 술이란 걸 마시고 난 뒤를 이야기해주는 광고, 개인적으로 참 맘에 든다. 이건 공감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광고가 당신도 그런 경험 있지 않나요? 하고 묻는 것 같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품었던 고정관념이 술 한 잔으로 무너졌던 경험이 많아서 이 카피에 꽂혔는지도 모르겠다. 


완성 카피:


낮과 밤, 한 잔 더

힘든 낮을 잊게 한 술이 

밤에는 과거까지 불러왔다

딱 한 잔만 더 하자


사실 술은 낮술이 더 맛있다. 그렇다고 밤에는 맛이 없나, 그것도 아니다. 당연히 밤에는 미치도록 달다. 일단 헤드라인에는 함축적으로 낮과 밤이라고 써줬다. 운율을 살려 ‘한 잔 더’를 디자인적인 요소로 강조해줘도 좋다. 많은 사람들인 술자리에서 ‘한 잔 더’를 외친다. 바디 카피 끝에 ‘딱’을 넣어 줬다. 실제로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한 잔 더 하자’ 보다 ‘딱 한 잔 만 더 하자’가 왠지 더 감칠맛 난다. 


‘과거까지 불러왔다’라는 글을 오래 보고 있자니 이름이 ‘과거’인 친구를 불러온 느낌이다. 술 마시다 보면 헤어진 누군가 생각나고 “전화해 볼까?”라는 용기가 생긴다. “그래 불러 불러!” 친구들이 부추긴다. 그렇게 과거라는 친구도 우리 술자리에 나타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가 힘들어서 동료와 마신 술로 툭툭 털어내는 거 참 낭만적이다. 아 근데, 밤에 마시는 술이 과거를 불러오는 건 좋지만 너무 멀리까지 가면 고달프다. 이러면 반드시 우는 사람이 나오니까. 

이전 18화 커피 덕에 쉽게 쓴 카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