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함께 애자일을 (10화)
“오늘은 안녕하신지요?”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입니다.
오늘은 지난 번에 이야기를 잠깐 꺼내다 만 단테(Dante) 선생과의 일담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겠지만, 삶이 고되고 팍팍할수록 사람들이 현실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종교에 의지하며 내세(죽음 뒤의 세계)의 축복을 기약하는 현상이 강화되곤 합니다. 특히 저의 육신이 살아있던 19세기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고 오직 신의 구원에 의해서만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이러한 현상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현실에서의 삶은 크게 의미가 없고 덧없으며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무기력함과 허무주의가 너무나도 싫더군요.
그래서 저는 선포했죠. ‘신은 죽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신으로부터만 삶의 의미를 찾고 신의 구원에만 의지하며 내세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 아니라, 두 발을 이 땅 위에 꼿꼿이 딛고 서서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마주하고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내고 자기 나름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과격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물론 이러한 주장이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희 집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기도 하거니와 기독교의 ‘사랑(유교에서의 인의[仁義], 한국에서의 광명사상과 홍익인간 정신)’은 여전히 저에게도 중요한 가치이기에, 기독교를 애정하는 마음에서 다소 왜곡된 부분에 대해 쓴 소리를 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는 비단 기독교에 한정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종교를 향한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내세(지옥, 연옥, 천국)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 단테 선생의 ‘신곡’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세와 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는데 일조하였기에, 저는 그런 단테 선생을 그냥 곱게만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단테 선생을 ‘무덤 위에서 시를 짓는 하이에나’고까지 표현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고요. 사실 제가 그 말을 했던 1800년대에는 단테 선생이 작고한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후였기에, 그리도 과감하게 욕을 할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아뿔싸! 그런데 여러분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제가, 오늘 속에 함께 살고 있던 단테 선생을 만나게 될 줄이야! 저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단테 선생이 자기를 욕하는 저를 보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원망과 분노를 쌓으셨을 지를 생각하니, 얼른 쥐구명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죠.
헌데 단테 선생은 저를 나무라기보다는, 당신의 억울함을 역설하셨습니다. 먼저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도 자신이 지은 제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제목은 ‘단테의 희극(La Commedia di Dante Alighieri)’이었으나, 보카치오(Boccaccio)가 이를 바꿔 ‘신성한 희극(La Divina Commedia)’, 즉 ‘신곡(神曲)’으로 높여 부르다 보니 뭔가 이 글의 느낌이 좀 달라진 것이 그 사단의 시작이었다는군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좀 더 사실적인 느낌이 들도록 표현한 것뿐인데, 사람들이 이를 진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소위 요즘 말로 ‘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를 모두 단테 당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신곡을 쓰던 당시에 단테 선생께서 미워하던 사람들을 지옥 속에 처박어 넣고 고통받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만 봐도, 신곡은 지옥과 연곡, 천국의 신념을 대중들에게 설파하려는 목적보다는 스토리의 몰입을 위한 소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도 덧붙였지요.
정작 단테 선생이 신곡을 통해 정작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원제 ‘단테의 희극(La Commedia di Dante Alighieri)’에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듯이 내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별’, 즉 ‘희망’에 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신곡의 주인공이 내세의 첫 관문인 ‘지옥문’을 들어설 때 그 문 위에는 아래와 같은 경고 문구가 적혀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 신곡 지옥편 3곡 9행
단테 선생은 이를 통해, 다른 곳이 지옥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곳이 곧 지옥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별(stelle)’을 통해 ‘희망’을 은유했지요. 그리고 신곡의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가장 마지막 단어를 모두 ‘별(stelle)’로 끝마치며 이를 강조했습니다.
지옥편의 끝에서는 지옥을 빠져나와 다시 바라보는 별(stelle)을
연옥편의 끝에서는 열망하는 별(stelle)을
그리고 천국편의 끝에서는 사랑으로 움직이는 수많은 별(stelle)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단테 선생은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별’은 ‘희망’을 상징하네.
그리고 별을 움직이는 ‘사랑’은 내게 주어진 삶이 어떠하든 이를 긍정하고 능동적으로 포용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이자, 나를 사랑하고 더불어 이웃을 사랑(유교에서의 인의[仁義], 한국에서의 광명사상과 홍익인간 정신)하는 것을 의미하지.
그러하기에 난 궁극적으로 자네가 주장하는 동일한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뿐일세.
그러니 니체여,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게나.”
그렇습니다. 단테 선생의 생각은 어쩌면 저의 생각과도 맞닿는 부분이 많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구의 생각이랄 것도 없이,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와 의지, 그리고 노력은 시대를 막론하고 초월하여 늘 존재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이순간에도 말입니다.
저도 음악 듣기를 참 좋아하고, 한때는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의 음악에 심취해 있었지만, 요즘은 BTS가 대세라지요? 저는 BTS의 노래 중에서도, 공연 엔딩곡으로 자주 불려지는 ‘소우주(Mikro-Kosmos; Micro-Cosmos)’라는 노래를 즐겨듣곤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자 희망이자 별이며, 깜깜한 밤일수록 그 삶을 더욱 능동적으로 긍정하고 끌어안는 힘(amor fati)과 그 힘에의 의지(will-to-power)의 빛남,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라는 연대의 끈을 놓지않고 사람별들(stelle umane)로 이루어진 소우주(cosmos)를 형성한다 노랫말이 너무 고혹적이더군요!
깜깜한 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여러분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BTS의 노래 ‘소우주(Mikrokosmos)’의 가사 일부를 소개하며 이만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이상, 과거에 살았던 니체가 아닌 여러분들의 오늘 속에 살고 있는 니체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여러분의 행복과 안녕을 빕니다!
반짝이는 별빛들
깜빡이는 불 켜진 건물
우린 빛나고 있네
각자의 방 각자의 별에서
~
가장 깊은 밤에 더 빛나는 별빛
밤이 깊을수록 더 빛나는 별빛
한 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 사람에 하나의 별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70억 가지의 World
~
각자만의 꿈 Let us shine
넌 누구보다 밝게 빛나
~
어쩜 이 밤의 표정이 이토록 또 아름다운 건
저 어둠도 달빛도 아닌 우리 때문일 거야
~
Shine, dream, smile
Oh let us light up the night
우린 우리대로 빛나
~
Shine, dream, smile
Oh let us light up the night
우리 그 자체로 빛나
- BTS의 『소우주(Mikrokosmos)』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