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불행을 통과하는 방법

by 나결

앞의 글이었던, '10. 어쩌면 내 이야기, 김낙수 부장님' 같은 일은 누구나 인생에서 크든 작든 한 번쯤 겪게 되는 일인 듯하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억울함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 뿐만 아니라 오랜 마음 수행을 한 다방면의 수련자들도 느낀다고 하니, 결국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거대한 랜덤 박스 안에서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며 일어나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런 일이 공평히 일어난다면,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태도의 차이라고 말한다. 익숙한 예로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와 '물이 반이나 남았네' 같은 관점의 차이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을 결정하기 전에 더 중요한 부분은 일단 이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진흙탕 속에서 주저앉아 울 것이 아니라 한 발을 빼내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그러기 위해 내가 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바라본다’는 것은 대양 위 휘몰아치는 파도의 소용돌이, 즉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한 발자국 높은 곳으로 떼어 놓음으로써 파도를 그저 지켜보라는 것이다.


물론 그 파도는 처음엔 그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몸부림을 칠 것이다. 몸과 마음을 할퀴어 놓을 것이다. 눈물이 난다면 울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감정을 억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그 파도의 상태인 감정을 정확히 보려 노력해 보자. 저 파도는 나를 집어삼키는 파도가 아니라 결국은 잠잠해질 파도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야 그 눈물과 비통함, 에너지 소모의 범벅에도 저 멀리 나라는 존재, 즉 본연의 자아가 별처럼 반짝이며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도가 한 바탕 휩쓸고 갔을 때, 남은 눈물 자국을 닦으며 당신이 할 일은 평정심으로 바라보는 연습이다. 이때야말로 일어난 일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말로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문제와 맞닥뜨릴 때 대부분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해석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앞 선 글의 상황에서 나의 에고는 처음에 이렇게 작동했다. "이건 너무 억울한 상황이야. 이유가 뭐야? 나를 이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 아… 옆팀의 나를 견제하던 분이 정치질을 해서 나를 밀어낸 게 분명해. 역시 사람들이 경고한 대로 여우 같은 사람이야. 혹시 그게 아니라면 나를 스카우트해 온 저 임원이 본인이 살기 위해 꼬리 자르듯 나를 자르려는 건 아닐까? 앞으론 어떻게 하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억울하다. 내가 도대체 이 회사에 왜 왔지?"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말이다. 이런 폭주하는 생각의 기차에는 명료함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저 에고의 지껄임에 불과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금까지 강조해 온 '바라보기'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는 그의 책 명상록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눈앞에 차려진 산해진미를 보고 문득, "이것은 생선의 시체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저것은 죽은 새, 이것은 죽은 돼지다. 와인이 귀하다고 해봐야 포도즙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사고를 사물을 인식하는 관념이라고 한다. 아무리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그것의 벌거벗은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의 헛됨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포장한 화려한 껍질을 벗겨내라.' 나 역시 한 차례 감정의 폭풍우가 휩쓸고 가도록 내버려 둔 뒤에 겨우 평정심을 찾았고 그제야 이 사건을 포장하고 있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명상을 하며 실천했던 것들을 현실에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억울한 감정을 한 꺼풀 벗겨내자, 모든 감정은 지속적인 것이 아닌 일시적이라는 것이 명료해졌고

이런저런 해석과 짐작들을 한 꺼풀 벗겨내자, 이건 단지 에고가 만든 스토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료해졌고

원망하던 이들에 대한 분노를 한 꺼풀을 벗겨내자, 이 분노는 독이 되어 내게 돌아올 것이라는 게 명료해졌고

불안의 마음을 벗겨내자, 내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는 것이 명료해졌다.


이렇게 계속 바라보며 알맹이까지 그 껍질들을 하나씩 벗겨 내었더니 앞의 글 '10. 어쩌면 내 이야기, 김낙수 부장님' 글에서 남은 것은 단 한 줄이었다.


'회사는 미래 역량 강화를 위해 팀을 새로 신설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은 결국 내가 선택한 일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는 명료함. 그렇게 나는 휘몰아치는 파도의 상태에서 대양과 같은 잔잔함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즈음 되자 내 에고는 한 풀 꺽이었고 내 본연의 존재를 높은 곳에 둘 수 있었으며, 앞에서 언급한 그 임원과의 1:1 미팅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사과드립니다. 제 팀원이기도 하지만 당신에게도 조직의 반이 없어진 것이고 힘든 변화였을 텐데 제가 너무 감정적으로만 이야기했습니다.'라고.


일본 에도시대에 ‘와도케이(和時計)’라는 시계가 있었다. 일반적인 시계와는 다르게 시침이나 분침이 고정되어 있고 시간을 나타내는 시패(時牌) 또는 시각판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데, 뭔가 시적이기도 하며 계절에 따라 변하는 시계의 흐름을 시간에 담고자 했던 동양적 관점이 녹아져 있는 시계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요즘 시계의 개념은 서양적 관점으로 시침이나 분침이 움직이고 시간은 고정되어 있는 형태. 즉,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내가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고 해석하지만 불교를 비롯한 많은 동양의 학문들은 나를 둘러싼 상황이 변하는 것이고 나는 그저 그 상황에 나라는 본연의 자체로 존재한다는 시각의 차이가 있다.


어떠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그것을 자초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로 인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며 나는 그저 내 본연의 모습 그대로 또 다른 시각판이(상황이) 올 것이라 믿는 관점인 것이다. ‘나‘라는 기준을 믿으며 지금 나에게 옳지 않다고 느껴지는 시간은 그저 배경처럼 흘러가는 것을 애씀 없이 바라보는 것 말이다. 이런 태도의 차이는 명상의 또 다른 중요한 관점인 '놓아버림'의 이해와도 연결된다.


'내려놓다'. '놓아버리다'. '흘려보내기'. 비슷한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이 'Letting go'의 개념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그라운딩하며 존재할 뿐, 시각판이 흘러가는 것. 강물이 변화하며 흘러가고 또 새로운 물을 맞이하는 것. 그리하여 억지로 잡고 있거나 막고 막히는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개념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고, 가로막고, 집착하면 그것은 결국 자연, 그리고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되고 이는 결국 슬프게도 개인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앞서 언급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는 이 놓아버림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그는 그 작동 원리를 매우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놓아 버림 기제의 문제 해결 효과는 아주 놀랍 다. 무엇보다 그와 관련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놓아 버림은 세상의 통상 적인 방법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쉽고 빠른 결과를 가져오는 접근법은 이렇다. 답을 찾지 말고, 문제 이면의 감정을 놓아 버려라. 문제 이면의 감정을 항복하면, 그 외견상 문제에 생 길 수 있는 다른 감정도 놓아 버릴 수 있다. 모든 감정 요소에 대해 완전하게 항복하면, 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답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감정'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Being’ 즉, ‘존재로서의 나'가 아닌 'Ego’ 즉, '스토리를 만드는 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에고의 끝은 허망함이다. 그리고 그 허망함의 끝이 깨달음으로 승화될지, 혹은 허망함 그 자체로 끝날지는 서두에 말한 것처럼 우리의 관점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게 될 때 조금 더 쉽게 '놓아버림'의 기제를 잘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을 공부하고 배우고 실천하면서 가장 짜릿한 쾌감과 놀라움을 느낄 때가 다른 시대, 다른 언어, 다른 종교 혹은 다른 학문이지만 수세기를 버티며 사랑받아 온 고전들이 언어의 한계를 넘어 결국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분리된 존재가 아닌 하나의 존재(Wholeness)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며 그것을 알려주고자 몇몇의 깨달은 자들이 그 표현만 다를 뿐,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그 사유를 증명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학문이 그 반걸음 뒤에서 열심히 쫓아오고 있는 것 같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철학적 텍스트 중 하나이자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행위에만 너의 권리가 있을 뿐,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BG 2.47)”. 즉, 이익, 칭찬, 실패, 성공 같은 그 결과에 마음을 흔들리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수행하라는 뜻이다.


지금 크고 작은 불행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가?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불행의 맨 얼굴을 바라보는 것. 에고의 스토리텔링으로 생겨 난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는 것. 연습을 통해 서서히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아있구나'의 관점으로 바꾸어 가는 것. 그리고 그저 지금 행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당신의 시공간이라는 시각판은 지금도 ‘나’라는 시계침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단지 행할 것은 바로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들숨과 날숨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 이 순간 '나'라는 존재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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