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어쩌면 내 이야기, 김낙수 부장

by 나결

최근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가 엄청난 공감과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예전 같으면 또 드라마적으로 희석한 회사원들 얘기겠거니 하고 흘려버렸겠지만, 나이가 이쯤 되고 보니 구구절절 감정 이입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김낙수라는 캐릭터에 말이다.


나는 A사에서 B사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고민이 많았다. 기존 직장에서는 하는 프로젝트마다 반응이 좋아 국내는 물론 글로벌에서도 커리어의 상승세에 있었기 때문이고 새로운 곳으로 이직한다면, 기존의 역할의 연장선이라고는 하지만 기업의 업태나 문화가 아예 다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나, 나는 나의 직관을 믿었다. 조직이 어떻든 내가 잘한다면 새로운 터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무엇보다 내게 스카우트 제의를 한 그 외국인 임원의 진심 어린 설득과 계약 직전 마지막으로 보내온 문자 -

'If I can convince you, I won't let you down.‘

(당신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 메시지에 결심의 추가 확실히 옮겨지며 결국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꽃피는 봄의 계절로 들어섬과 동시에 이직을 했고 새로운 팀원들과 합을 맞추어가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연말을 앞두고 이곳에서 넥스트 글로벌 비즈니스로 보고 있는 신사업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다. 나는 내 네트워크와 기존엔 없었던 솔루션을 제안하여 결과적으로는 높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었다. 보고를 하는 팀마다 칭찬해마지 않았고 함께한 팀원들에게도 유의미한 포트폴리오를 안겨준 것 같아 뿌듯했다. 어깨가 으쓱했다.


마지막으로 CEO 보고를 끝낸 다음 날, 나를 스카우트해 온 그 상사가 1:1 미팅을 요청했다. 이제 곧 조직개편 시기이기도 하고 이직 시 약속한 커리어패스에 관한 내용이겠거니 짐작하며 가벼운 미소와 함께 미팅룸에 착석했다. 그런데 그는 난데없이 ‘회사의 방침으로 너의 팀원들을 모두 다른 팀으로 귀속시켜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넌 팀원이 없어지기 때문에 넌 당분간 Indivisual contributer로 일을 해줘야겠어.'라고 무덤덤히 말했다. 잠시 간 어안이 벙벙했다. 감정을 주체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쏟아내고 CMO 면담을 해도 정확한 연유를 알 수 없었고 '회사의 미래 역량 강화를 위해 새롭개 팀이 필요해서 내려 온 방침이라 따라줬으면 한다.'라는 말뿐이었다.


며칠 지나 알고 보니, 높으신 분이 오시면서 새로운 부서를 신설하는데 우리 팀뿐 아니라 다른 팀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긁어 그 산하로 모은 것이었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합당한 사유도 없이 그 변화의 등 터진 새우.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그제서야, 이직 전 조언을 구했던 한 대표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근데, 본인 커리어가 지금 너무 좋은데, 꼭 가야 해요? 거기 조직 문화가 안 좋다는 평이 많아서...' 그때, 조직문화를 언급하며 사람들이 말릴 때 이유가 있었구나.

아니, 나는 귀를 여는 척했으나 귀를 막았던 것이구나. 상담을 하는척했으나 여기들 보세요. 저 이런 데서 스카우트받았어요 하며 떠벌리고 싶었던 것이구나. 그러니까... 나는 나의 직관을 따른 것이 아니라 에고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구나.


그 후 일주일 간, 내 감정은 말 그대로 널을 뛰었다. 마치 독한 실연의 상처를 얻은 사람처럼 이틀간은 날 스카우트해 온 그 임원을 생각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억울함에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잘 나가던 회사에서 본인 말 믿고 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하며 그를 탓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불행한 사건이 그러하듯 이틀 뒤부터는 점차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마지막 이틀 간은 어째 저째 평정심을 찾아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주말이 지나고 새롭게 배정된 자리배치도가 공유되었을 때 겨우 가라앉힌 마음이 크게 울렁였다. 전체 층에서 가장 사람수도 많고 왁자지껄했던 우리 팀이 다 빠져나간 창가 자리는 옆팀의 차지가 되었고 선후배들 사이에서 '승승장구 워킹우먼 커리어'로 대변되던 내 이름은 텅 빈 책상들 사이 한자리에 초라하게 쓰여있을 뿐이었다. 새로 배정받은 자리에서 모니터와 책상을 정리하는데 또 한 번 뜨거운 것이 울컥하며 올라오는 듯했다. 그리고 찰나를 놓칠세라 또 슬며시 에고라는 녀석이 한 마디 거들었다.


'내가 무능하기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 다음 글에서 이어 나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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