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자발적 고립 - 새로운 연결의 시작

by 나결

수년 전, 나의 첫 책인 아이슬란드 여행기가 출판되었을 때, [최인아 책방]이라는 곳에서 북 콘서트를 가진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북 콘서트를 신청하셨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단지 아이슬란드의 멋진 사진과 여행기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겨울 한가운데를 홀로 일주하면서 느꼈던 수많은 감정 중 어떤 가치를 전하면 좋을지를 고민하다가 ‘외로움의 가치‘로 키워드를 잡았다. 요즘 후배들은 물론 친구나 선배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내가 번-아웃을 겪었을 때 ‘자발적 고립’이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되새김질해보곤 한다. 아이슬란드의 링로드를 돌던 중 심심치 않게 만났던, 외딴곳에 우두커니 하지만 어떤 것도 개의치 않으며 덤덤하게 서 있던 오두막에 나를 대입시켜 보며 떠올렸던 그 생각. 그리고 내가 스스로 변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선택한 방법. 그리고 이제는 일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치. 오늘은 ‘자발적 고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고립은 도피일까, 선택일까?

자발적 고립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자발적 고립 (Voluntary Isolation)‘과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먼저 자발적 고립은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여 사회적 상호작용을 줄이거나 단절하는 상태. 사회적 고립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따른 심리상태 또한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자발적 고립은 주체적으로 고립을 선택했기에 스트레스나 외로움이 적은 반면 사회적 고립은 관계 형성의 어려움이나 기회의 부족으로 발생하기에 당연히 외로움, 소외감, 우울, 불안 등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내가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간절히 바뀌고 싶었기에, 그러기 위해 나 스스로를 제대로 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의 일상 중 가장 소모적인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고 첫 번째 답은 너무나 쉽게 나왔다. 바로, 스마트폰. 그래서 나는 요즘 많은 이들이 얘기하는 디지털 디톡스와 비슷하게 모든 SNS (Social Networt Service) 활동을 중단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쏟아지는 알고리즘의 무분별한 스크롤링, 그리고 무의식적인 비교와 허세가 득실 한 그 콘텐츠들로부터의 고립을 선택함과 동시에 그 시간을 활자를 읽는 시간으로 대체했다. 즉, 도파민과 뇌의 편도체를 자극하는 것에서 뇌의 기능을 두루 쓰는 활동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도피처로 삼았던 심야의 넷플릭스 시청 대신 잠자리에 일찍 드는 습관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른 기상과 오전의 자기 계발 시간은 그에 대한 당연한 과정으로 뒤따라왔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최대한 이른 아침과 수면 전 명상 시간과 저널링 시간을 짧게나마 지켰다. 지금도 그때도 일하는 엄마로서 육아를 하고 있기에 이른 아침 혹은 늦은 밤에만 혼자만의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아이를 재우기 전 가능한 명상 의자에 앉는 시간을 선택했던 것이다. 명상하는 동안 아이가 내게 오면 무릎에 앉혀서 같이 호흡했다. 안아 달라고 하면 안고 같이 호흡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엔 엄마의 짧은 고립을 방해하는 아이가 아닌, 엄마를 따라 눈을 감고 명상하는 아이가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시간은 비록 짧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런 생활 속의 고립을 선택했다. 변화하기로 마음먹은 것에 비하면 아주 일상적이고 가벼운 방안이었지만 그 효과는 굉장히 컸다. 내게 주어진 하루간의 시간을 스마트폰이 아닌 오롯이 내게 집중하는 그 ‘선택적 고립‘의 시간은 사회적 고립 상태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도피의 시간과는 정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쁘고 정신없던 일상 속에서 주도적으로 나만의 고립을 만들어 낸 나 스스로가 기특했다. 즉, 내가 직접 경험한 결과, 두 상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발적 선택권’과 ‘심리적 만족도’였던 것이다.


자발적 고립,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

생각해 보자. 하루 24시간 중 수면 시간 약 8시간을 제외하고 당신의 관심이 내면을 향해 있는 시간, 무의식이 아닌 의식적으로 생활하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안테나를 밖을 향해 뻗고 있다.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눈 저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 쉴 새 없는 카톡과 손 안의 휴대폰에서는 전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를 해준다. 하지만, 오늘 나의 감정이 어떤지, 나에겐 어떤 일이 어떻게 와닿았는지, 지금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 바라보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많은 이들에게 물어보면, 단 10분이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외부를 향한 안테나를 나에게로 돌려 나의 내면을 향하게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조금씩 조금씩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거둬들일수록 그 영향이 줄어들고 그 에너지는 오롯이 내 내면으로 향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연습할수록 내면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창의성, 사유, 감정의 정리 등은 고립 속에서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고립 속 생산적인 창조성은 곧 자율성과 주체성의 회복과도 연결된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아닌 혼자 있을 때 진짜 나의 욕망과 선택이 드러나게 되고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 자기 중심성을 되찾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 정보 과잉의 시대에 자발적 고립은 나아가 디지털 해독의 형태와도 맞닿아 있다.


고립은 연결의 반대말이 아니다

누군가는 고립을 외로움과 단절로 오해한다. 하지만 자발적 고립이란 연결의 반대말이 아니라, 자신과의 더 깊은 연결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그를 통해 산만하게 외부로 분출되던 에너지를 거둬들이고 오롯이 자기에게로 향하게 만들어 결국 스스로의 고유함을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자기애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 자기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나만의 알리바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장점과 의미를 가졌지만 그중 가장 다행인 것은 자발적 고립이라는 것은 그 의미에 비해 결코 거창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신이 쉽게 관심을 빼앗기는 무언가가 있다면, 예를 들어, 무의식적인 인스타그램과 틱톡 스크롤링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면, (물론, 큰 결심이 필요하겠지만) 잠시 동안 앱을 삭제하는 것만으로도, 증명하기 위한 사진을 찍는 시간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자발적 고립’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소음에 가려져 있던 ’나’라는 본질과의 연결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확신해 본다.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외부의 목소리에 덜 흔들릴 수 있다. 나의 감정을 바라보아야 외부의 자극으로 인한 나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자발적 고립의 가치는 내면을 지키고 ’나’라는 삶의 중심을 회복하는 데 있는 것이며, ‘나’의 연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반어적이지만, ‘연결’의 동의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덤덤하게 서 있던 아이슬란드의 그 오두막처럼

지금 나의 핸드폰엔 다양한 앱들이 다시 깔렸지만 예전처럼 외부 요인으로 인한 감정의 요동침이나 번-아웃에 허덕이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아마 위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자발적 고립’의 일상적 실천이 이뤄지고 있기에 예전만큼 외부의 외부의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도 않는 한 겨울 눈보라 속 아이슬란드의 황야에 덤덤하게 서 있던 아이슬란드의 그 오두막처럼 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권하는 자발적 고립의 가장 쉬운 방법은 하루 20분 아니, 10분 혹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만이라도 고요하게 나의 호흡을 좇아가보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바라보면서 단지 나의 육체가 아닌 ‘존재’를 다시 확인하면서 그렇게 모든 잡음과 불순물들이 가라앉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그렇게 아주 잠시라도 외부를 향해 뻗어있던 그 불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거둬 오롯이 나의 현재와 감정에 집중한다면 놀라운 연결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저 깊은 무의식 아래 덮어 두었던 뿌리 감정이든 직관적인 아이디어이든 혹은 그저 고요함이든 말이다. 그러니 부디, 잠시라도, 나의 책에서 등장하는 글귀처럼, ‘나를 줄이면 더 또렷한 것들을 볼 수 있게 됨‘을 경험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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