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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 Jan 23. 2024

'나는 누구인가?'라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지난 글에서의 숙제를 한 번이라도 해보았는가? 길 건너편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변화의 첫걸음이자, 그만큼 중요한 과정이다. 변화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일어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어느 날 '길 건너의 나'를 자각하였을 때, 공교롭게도 죽고 싶다고 되뇌던 상태였다. 당시의 나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물질적으로도 그러했고 남편과 아이도 다정하고 사랑스러워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나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며, 응원을 보내는 후배들로부터 감사하게도 존경을 받고 있기도 했다.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함이 없는 삶. 그런데 딱 하나, 승진이 늦어졌다. 일은 곧잘 했고, 고과도 우수한 편이었지만 승진해야 할 시점에 다른 부서에 서 온 상무님께 다시 바닥부터 증명해 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그 상사의 라인을 잘 탄 이들은 툭툭 그 자리에 잘만 올랐는데 말이다. 여기에 다 쓸

수는 없지만, 꾸역꾸역 수많은 프로젝트들로 꽉 채운 3년을 보내고, 이 정도 성과면 올해는 승진 가능하겠지? 하고 열어 본 승진자 발표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그 대신 팀장 자리 욕심 없다며 허허거리던 친구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뚫어져라 화면을 쳐다보던 나는 망설이다가 상무님께 전화를 드렸다. ‘저는 뭐가 문제였던 걸까요?’라는 질문에 전화 너머로 '나한테 자리 맡겨놨니?'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그 문장은 비수가 되어 마음을 후벼 놓았다. 억울함, 원망, 분노, 슬픔. 그때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얼마나 울었는지 당시 거울 속 내 얼굴은 말 그대로 울상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팀원으로 있던 신입사원 후배가 어느 날 내게 사내 심리상담 센터에서 번아웃이 왔다는 진단을 받았다며, 업무에서 제외를 시켜줬으면 좋겠단다. 입으로는 "그래, 추석 연휴가 다행히 좀 기니까, 지금 업무에서 빠지면 한 달 정도쉬엄쉬엄 할 수 있겠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내 안의 어떤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번아웃? 니가 내 앞에서 번아웃을 말하다니. 20여 년 쉼 없이 일하는 동안 번아웃이란 걸 생각해 본 적 조차 없던 나인데, 앞으로 어찌 될지도 모르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또 일 년 동안 나를 갈아 넣어야 하는데, 번아웃이라니.'라고. 여전히 정체 모를 어두운 감정과 생각들이 거대한 번-아웃 도미노가 되어 나를 덮쳤다. 겨우 잡고 있던 정신줄이 파사삭- 타버린 것이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쌓이고 쌓인 일상을 살아내고 있던 어느 날 퇴근길, 자차로 출퇴근을 하던 나는 한남 오거리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는 걸 보고 속도를 줄이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아, 저 차 그냥 박아버릴까?'라고. 그것은 그간 쌓여있던 것이 표출된 머릿속 첫 목소리, 길 건너편의 내가 중얼거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로 시작된 생각이 다음 날은 '그냥 죽고 싶다.' 또 다음 날엔, '저분 방에서 뛰어내리면, 그분이 충격을 좀 받을까?' 또 다음날엔 '부모가 생을 마감할 때 어린 자식을 데려가는 마음을 알 것도 같다'로 무섭게 생각이 번져나갔다. 그러던 중, 하루는 침대에 누워 남편에게 "얼마 전 기사에, 아이를 데리고 차를 바다에 끌고 가 익사한 부부 기사가 나왔는데, 왜 아이를 데리고 목숨을 끊는지 알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세상 다정한 남편이 그 말을 듣자, 이불을 박차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 남편은 정말 자상한 사람이다. 내가 승진 고민이나 회사 고충을 이야기할 때면 늘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해 주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카카오톡의 프로필은 아이와 찍은 사진 대신 시커먼 사진으로 바뀌었고 만나는 이들마다 회사를 탓하고, 잘한 프로젝트조차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내가 있었다. 매일이 그랬다. 사람의 뇌라는 것이 참 대단함 것이, ‘죽고 싶다’는 명령어를 입력받은 뒤부터는 그 생각을 실제로 어떻게 실현시켜 줄까를 고민하는 단계까지 나를 데려가는 게 느껴졌다.


 그즈음 주말 오후,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한 사이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고 싶은 건가. 정말 그런가. 아니, 살아야지. 근데 왜 이 머릿속엔 죽고 싶다는 목소리로 가득 찬 거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더 열심히 해서 더 잘 살고 싶은 ‘나는’ 누구이고, 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리는 그 죽고 싶은 ‘나는’ 누구인 거지?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 말이다. 짧지만 정말 강한 경험이었다. 길 건너편의 나를 그렇게 처음 바라보았다. 알아차림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을 뒤져 미리 사 둔 크리스마스 카드를 꺼내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이 어둠의 동굴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나를 좀 믿고 기다려달라고. 그렇게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만약에, 그때 그 순간. 내가 길 건너편의 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그 짧은 알아차림이 없었다면 그 끝은 어땠을까? 끔찍하지 않았을까.

 

 숲 속의 명상가로 유명한 에크하르트 툴레는 그의 책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역시 자살의 고비까지 몰고 간 강박적인 생각과 마음이 만들어 낸 허구의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덧붙인다. 당신이 '나'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대개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구조물의 일부, 즉 에고의 지배를 받는 자아이다.라고. 길 건너편의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의 상태에 대해 거리를 두지 않고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 동일시되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 감정이 '나'이며, 그 생각이 '나'라고 쉽게 합일화되어 버린다. 그것이 명상 전, 일반적인 상태의 삶이다. 즉, '나는=화가 났어!'의 동일시 상태와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화라는 것이구나'라고 바라보고 알아차릴 수 있음의 차이이다.


 명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자각하는 상태에 가깝다. 흘러가는 감정과 마음을 보고 명료해지는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허둥대던 마음이 조금씩 단순해진다. 그래서 명상을 시작할 때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길 건너 편의 나를 바라보고자 하는 용기 말이다. 지금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탈출구가 필요한 당신이라면, 이제 조금씩 명상할 준비를 해보자. 그 준비란 두꺼운 방석과 향초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의 삶에서 적절한 시기,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과 호흡에 주의를 가져갈 준비가 된 시점을 말한다. 사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이미 준비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10분-15분 시간을 내어 '내'가, '나'에게 주의를 기울여보라.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떠한가. 감정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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