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입원을 하셨다.
백내장 수술을 하신 후부터 안약을 자주 넣곤 하셨는데 지난 밤 새벽에 주무시다 깨셔서 습관적으로 안약을 넣다가 후시딘을, 아니 어쩌다 후시딘을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후시딘을 눈에 넣었다는 거다. 결국 눈이 끈적거려 눈을 세게 비비다가 각막이 찢어졌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엄마가 아빠에게 자주 쓰는 '말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엄마가 그 표현을 아빠에게 쓰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 표현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정말 말꾸짓을 크게 하셨다.
다음날 오후, 일을 정리하고 전주로 내려갔다. 아빠 덕분에 모교의 대학병원을 오랜만에 가 본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병원 본동으로 올라가 보니 나와 교대를 하기로 했던 엄마가 밖에 나와 계셨다. 저녁을 먹지 못했기에 나는 잠시 편의점에 들려 라면이라도 먹고 가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살짝 당황해하더니 아직도 밥을 먹지 않았냐며 아빠도 1층에 나와 있으니 다같이 편의점에 가자고 하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살짝 짜증이 났다. 어차피 엄마랑 교대하면 알아서 올라갈 건데 뭐하러 수술까지 하신 분이 밖에 나와 있냐며, 더구나 이 추운 날 편의점까지 따라가냐고, 아빠를 도로 올려보내라고 했다. 안에서 기다리시다 엄마와 내가 들어오지 않자 밖으로 나온 아빠는 자기도 편의점에 따라가겠다고 하셨다. 두 분이 라면 먹는 거 지켜보면 소화가 안 될 거 같다고 말을 했지만 끝내 부모님은 내 뒤로 두어 걸음 떨어진 채로 따라오셨다. 코로나 때문에 편의점 취식이 되지 않자 나는 편의점 도시락을 하나 집었고 우리는 다시 휴게소가 있는 병원 본동으로 향했다. 맨날 먹는 편의점 도시락을 전주까지 와서 먹냐며 나가서 밥을 먹고 오자는 아빠의 말에 나는 '됐어'라는 짧은 말로 일축했다. 여기에 엄마의 '뭐하러 이 늦은 시간에 전주까지 왔냐.', '이 추운날 병원에서 잘 수 있겠냐.'라는 말까지 듣자 나는 다시 짜증이 났다.
'이미 왔는디 뭐 더러 그런 말을 혀. 나 안 왔으면 엄마가 잤을 거 아녀. 엄마는 안 춥간?'
'히터 나오니 안 춥지.'
'엄마가 안 추우면 나도 안 추워.'
엄마는 '긍가?'하며 머쓱하셨다. 엄마를 배웅하고 아빠와 함께 병원 안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가 전자레인지에 도시락을 돌리며 세상에 무슨 후시딘을 눈에 넣었냐고 면박을 주자 아빠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말을 돌리셨다. 아빠는 어제 응급실까지 갔다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고 나는 계속 타박을 주는, 서로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대화가 밥 먹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늦은 시간이어서 우리는 바로 잠을 잘 준비를 했다. 병원 안은 반팔을 입어도 될 만큼 따듯했다. 대체 엄마는 무얼 걱정한 건지, 이런 생각을 하며 몸을 뒤척이는데 엄마한테서 문자가 왔다.
'엄마 집에 잘 도착했어.'
병원의 아침은 일찍 시작했다.
간호사가 들어와 이리저리 약을 챙겨주는 소리에 깨어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이었다. 내 눈을 의심했지만 나만 빼고 다들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이번에는 아침밥이 오는 소리에 깼다. 일곱 시였다. 식전 약은 챙겨 먹었는지 여쭤보고 아빠가 아침밥을 먹는 걸 도와드렸다. 카드를 주시며 내가 먹을 걸 사 오라 하셨지만 이미 10년 넘게 아침밥을 챙겨 먹지 않는 나는 무얼 먹을 정신도, 속도 아니었다.
오전 진료도 빨랐다. 밥을 먹자마자 환자를 부르는 인터폰에 따라 우리는 2층에 있는 진료실로 향했다. 위치를 안다며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따라가는 동안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의 걸음이 이제 다섯 살 먹은 조카의 걸음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걸음걸이뿐만 아니었다. 눈 수술 전부터 아버지의 말과 행동들이 예전과 다르게 느려진 걸 알 수 있었다. 아빠는 트럭 운전을 하시던, 소위 터프한 늑대 같은 분이셨다. 트럭 운전을 드만두시고 엄마와 함께 김밥집을 하던 어느 날, 아빠는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다 뒤차에 치여 차 보닛 위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뇌출혈로 의식이 없던 아빠는 3개월 후 기적같이 깨어나셨지만 아빠는 예전의 아빠가 아니었다. 전두엽을 다쳐 감정 통제를 잘하시지 못해 터프한 늑대는 화를 잘 내는 늑대가 되어버렸고, 약물 치료를 시작한 후부터는 온순한 늑대가 되셨다. 온순한 늑대는 늑대가 아니었다.
사람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면, 어쩌면 그 과정에 아이로 태어난 사람이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의사들도 참 피곤하겠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안과 진료실에 오자 아니나 다를까 당직을 섰던 의사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아빠의 성함을 말씀드리고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의사 쌤도 아빠가 눈에 후시딘 넣은 거 알아?'
'아, 말했지.'
'진짜로?'
'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각막이, 각막이 찢어진 게 말썽이제.'
말을 또 돌리는 아빠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미 응급실에 아빠와 같이 갔었던 형을 통해 나는 아빠가 창피해서 차마 의사 선생님께 후시딘을 넣은 사실을 말하지 않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행히 눈 수술은 잘 되었고, 수술로 인해 눈 안에 차 있는 가스가 시간이 지나 잘 빠지기만 기다리면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조금만 참으시라고 아빠를 달래셨다. 아빠가 또 아이처럼 보였다.
병원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친한 친구와도 온종일 있으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텐데 아빠랑 있으니 오죽할까. 나는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병실의 침대와 침대 사이에는 커튼 하나로 가려져 있었기에 옆 침대에서 하는 말이 다 들렸다. 옆 침실에는 아빠와 마찬가지로 눈을 다친 아저씨가 누워 있었고 아내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보호자로 계셨다. 두 분이 대화를 이어가는데 아빠가 알은 채를 하셨다. 아마 내가 오기 전에 두 분이 한 대화를 들었었나 보다. 차 사고가 났는데 상대방이 보상을 형편없이 해줬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는 목소리를 죽인 채 나에게 전해주었다. 자동차는 우리 집 남자들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대상이다. 그 때문에 나도 책에 있는 글씨보다 옆 침대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런 내 귀에 걸리는 건 두 분의 이야기보다 두 분이 쓰시는 억양과 어미, 그리고 단어들이었다.
내게 너무 익숙하고 또 자주 사용하는 저 전라도 사투리. 끝이 살짝 길어지는 억양, 'ㅓ/ㅏ'가 아니라 'ㅕ/ㅑ/ㅣ'로 끝나고 때로는 'ㅇ'이 받침에 쓰이는 어미, '솔찬히, 시방'과 같이 타지에서는 잘 듣지 못하는 단어들이 쉴 새 없이 들렸다. 전주를 떠나 어느새 10년 가까이 대전에 사는 나에게 이렇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게 조금씩 낯설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환자를 부르는 병실 안의 인터폰을 받았던 한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었다.
'아침밥이 인제 나왔는디, 이거 다 먹고 진료 가면 안 되는 거여? 시방 겨우 한 숟갈 떴는디잉.'
이런 생각들에 내가 웃음을 짓자 아빠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사람들이 다 사투리를 쓰잖아'
'니는 안 쓰는 줄 아냐?'
그말에 아빠와 내가 동시에 웃었다. 맞다 나는 편안한 자리에서 또래치고는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고, '거시기'라는 단어도 일상용어처럼 자유롭게 쓰곤 한다. 내가 가끔 사투리를 쓰면 신기한 듯 쳐다보는 시선들이 이곳에는 없었다. 사투리를 실컷 쓰고 가리라. 여기는 내 고향 - 내 언어를 길러준 곳이니까.
책을 읽다 보니 아빠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대로 몸을 왼쪽으로 돌린 채 주무시고 계셨다. 아빠의 머리가 온통 하얬다. 예전에는 염색도 종종 하셨지만 사고 이후에는 머리에 화학 약품을 바르는 걸 꺼리시다 보니 어느새 백발이 되셨다. 우리 집안은 머리숱이 많은 집안이다. 그래도 세월은 이길 수가 없는지 아빠의 머리숱이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것만큼은 많지 않았다. 이틀 동안 머리를 못 감으셔 기름져 있는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아빠도 자고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음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머라 해야 할까. 애잔하다고 해야 할지. 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나는 무언가 자꾸 안쓰러운 이 기분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병실에서 3개월 만에 깨어난 아빠 옆에 있었을 때 아빠는 재활 치료시간 이외에는 TV만 보시며 시간을 보내셨다. 아빠에게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25살에 형을 낳아 아버지가 되어야 했던 아빠의 온 관심사는 우리를 키우는 것, 그러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전부였었다. 아빠가 유일하게 관심 있어 하는 자동차도 어쩌면 시내버스, 학원버스, 트럭 등을 운전하시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흥미일지도 모른다.
이제 형과 나는 다 컸다. 그리고 더 이상 아빠는 고정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전주에 갈 때마다 아빠를 보고 있으면 아빠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 안에서 허우적 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어제오늘 지켜본 아빠는 딱히 하시는 게 없었다. 더구나 여기는 안과 병실이라 TV도 있지 않았다. 형과 내가 아빠의 20대를 아버지라는 삶과 맞바꾸게 한 건 아닌지. 아빠에게 전부인 우린 정작 아빠를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두 조카의 아버지가 된 형을 보고 있으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 슬펐다. 아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책을 읽고 있는 데 아빠가 눈을 뜨셨다.
'아빠 산책하러 갈래?'
잠에서 덜 깨셨는지 아빠는 아이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셨다.
산책을 끝내고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엄마한테서 영상 통화가 왔다. 하지만 막상 전화를 받아보니 어린 두 조카가 서로 화면에 나오려고 카메라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린 생명의 소리가 병실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소리를 급하게 줄여본다. 첫째 조카는 이제 제법 똑 부러지게 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었고, 둘째 조카의 말은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옆에서 조카의 할머니,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둘째 조카의 말을 해석해주었다. 엄마는 신기하게도 조카들의 언어 세계를 다 알고 계셨다.
다른 환자들에게 시끄러울까 봐 나는 어서 할머니를 바꿔 달라고 했다. 나는 내일 다시 대전으로 올라가야 하기에 아빠에게 필요한 물건들 - 샴푸, 종이컵 등을 말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화면 너머의 아빠를 보며 한마디 던지셨다.
'좋것수, 응? 아들내미하고 하루종일 붙어 있응게.'
아들만 둘 있는 집안에서 엄마는 유일하게 다른 성(性)과 다른 성(氏)을 가진 사람이었다. 목욕탕을 갈 때마다 형과 내가 아빠를 따라 또르르 들어갔다 또르르 같이 나오는 걸 부러워 하시던 엄마는 이번에도 무언가 아쉬운 말투셨다.
'아빠, 나 내일 다시 올라가. 아침 밥이랑 오전 진료받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요.'
엄마는 가게 문을 닫고 저녁이나 오실 텐데. 아빠의 눈 상태보다 아빠가 혼자 어떻게 시간을 견뎌내실지가 더 걱정이 되었다.
저녁밥이 나왔다.
'아따, 하는 것 없이 밥만 먹는구만.'
아빠는 나에게 또 당신의 카드를 주시며 좀 배부르게 이것저것 사 와서 나도 저녁을 먹으라고 하셨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아빠 카드를 받았다. 아빠는 지금 무직이다. 화를 잘 내는 늑대가 된 아빠는 손님들에게도 화를 내셨고 덕분에 가게의 손님은 반토막이 났었다. 엄마는 그 길로 김밥집을 접으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엄마는 삼촌과 함께 닭강정 가게를 시작하셨고, 아빠는 엄마 가게와 형 가게에서 잠깐씩 일을 도우며 월급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아빠의 수입은 엄마와 형이 주는 월급, 그리고 내가 주는 용돈이기에 아빠 돈을 쓴다는 건 결국 우리 가족 돈을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가장과 운전. 평생 운전을 하시며 우리를 키운 아빠에게 이 두 가지는 하나와 같다. 자식이 전부인 사람에게 이 둘은 자신의 존재 가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아빠가 지금은 운전을 업으로 하지도, 밖에서 돈을 벌어 오지도 않고 계신다. 나는 아직 아버지가 아니므로 아빠의 기분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는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가끔 내 차 조수석에 앉아 깜빡이를 켜라는 둥, '오바홀'을 크게 돌라는 둥 이런 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으실 때마다 아빠에게 별소리를 하지 않는 것, 비싸지 않은 밥값을 아빠가 계산을 하겠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못 이기는 척 계산대에서 자리를 비키는 것이 내가 아빠를 예전의 아빠로 만들어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싼 거만 사 먹을 거라며 아빠에게 으름장을 놓고 나는 병원 지하의 편의점에 들러 아빠 말대로 이것저것을 골랐다. 그리고 몇 개는 아빠 카드로, 또 몇 개는 내 카드로 계산을 했다.
낮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저녁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주무시고도 잘만 자는 아빠를 신기해하며 나는 외투를 걸치고 잠시 병실 건물 밖으로 나가보았다. 대학병원은 모교 바로 옆에 있다. 모교도 모교지만 대학병원 앞도 나에겐 익숙한 곳이다. 이십 대 중반 무렵 이 근처 독서실에서 1년간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었고,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이 근처에 살아 줄곧 집에까지 데려다주던 길이었다. 상가들이 몇 개 달라져 있었지만 몸이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 덕분에 오랜만에 여길 다 와 보네.
도서실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 사람의 집은 그대로일까? 순간의 궁금증으로 기억 속 그 집을 찾아가 볼까도 했지만 아빠를 혼자 두고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건 아니지만 이 밤에 내가 자리에 없는 걸 알면 걱정하실 게 분명했다. 그리고 충분히 그리워했던 것들을 다시 그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는 여전히 주무시고 계셨고 왼쪽으로 누워 자는 바람에 왼손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아빠의 손가락 사이로 내 검지를 넣어 보았다. 아빠는 잠결에 내 손가락을 살포시 쥐셨다. 조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 내가 검지를 조카의 작은 손바닥에 놓으면 조카도 이렇게 내 검지를 쥐곤 했었다. 조카의 작은 손과 달리, 또 오랫동안 펜만 잡아 온 내 손과 달리 아빠의 손은 크고 투박했다. 아빠의 손가락들을 내 엄지로 쓰다듬어 본다. 손목에는 내가 내가 사드린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했던 당시 내가 사드린 내의 세트를 아빠는 헤질 때까지 입으셨다고 했다.
문득 먼 훗날 이 순간을 오래도록 그리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모교의 병원 주위를 지나는 날이 오면 이십 대의 그 날들 위로 오늘이 겹쳐저 더 슬퍼질 거란, 어쩌면 아빠와 같은 손을 갖게 되는 때가 오면 기형도의 시처럼* 오늘을 떠올리며 우는 긴 겨울의 어느 날이 있을 거란 예감으로.
아빠는 여전히 왼쪽으로, 나를 향해 아이처럼 웅크리고 있었고 일찍 시작하는 병원의 하루를 생각하며 나도 아빠를 향해 누워 눈을 감았다.
* 기형도, '바람의 집 - 겨울판화 1' 중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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