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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현 Dec 30. 2023

아름답다, 도저하다, 온연하다

달을 함께 보던 밤 제 조카의 머리에 꽂혀 있던 핀처럼

 첫째 조카와 같이 밤 산책을 하던 밤이었습니다. 조카는 자전거를, 저는 보드를 타고 집 근처를 돌아다니다 조카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달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니 보름이어서 그런지 동그란 달이 구름을 끼고 있어 은은하게 달무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놀란 건 그런 달 때문이 아니라 조카의 입에서 나온 '아름답다'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도 안 된 조카가 '아름답다'라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쓴 것인지 아니면 '예쁘다'라는 표현을 대신해 쓴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름답다'는 '예쁘다'와 의미가 분명히 다르며 일상에서 구어체로 흔하게 쓰는 표현은 아니니까요.

 "아름다워?"

 "응, 아름다워."

 저의 되물음에 조카는 그 조그마한 입술로 아름답다고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그런 조카의 머리를 달을 만지듯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오랜만이었거든요, 무언가에 대해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말을 들어본 것이. 그날 저는 마치 잃어버렸던 말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날의 달이 제 눈에도 아름다워 보였던 것은 조카의 표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더 예전,  외딴방』을 처음 읽었을 때 '도저한 삶, 인생은 모두를 주지도 모두를 가져가지도 않는다'라는 표현을 보고 '도저하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도저하다 : 학식이나 생각, 기술 따위가 아주 깊다.]

 '도저하다' 속 '도저'는 '도저히'의 '도저'와 같은 말이더군요. 평소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만날 때와 달리 굉장히 낯선 감정이 들었었습니다. 국어를 전공하면서 '깔끔하다'나 '솔직하다'와 같은 단어가 '-히'를 통해 '깔끔히', '솔직히'처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저히'를 '도저하다'와 연결 지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저에게 '도저히'는 그저 '도저히'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20대 초반에 처음 읽은  『외딴방』을 3년 터울로 다시 읽곤 했습니다. 그렇게 다섯 번을 더 읽어가는 동안  정말로 삶은 도저했고 덕분에 많이 웃고, 때로는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는 가만히 '도저하네.'라고  읊조려보곤 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이 단어가 어울리는 순간을 만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럴 때마다 제가 그 순간순간에 진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가을 날씨가 참 좋아서 제가 느낀 어제의 가을을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다 '온전하다'를 섰다가 '온연하다'라는 단어로 무심코 바꿔봤습니다. 두 단어를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글을 쓰다 문득 '온연하다'의 뜻이 정말로 제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지 궁금해 찾아보니 정작 사전에는 '성격이 온화하고 원만하다'라고 나오더군요. 예상치 못한 검색 결과에 애초에 이 단어의 뜻이 '온전하다'와 비슷하리라 생각했던 저 자신이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마 저는 '완연하다'와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발견한 '온연하다' 역시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어제의 가을과 무척 잘 어울리는 말이었고, '온전하다' 덕분에 이 단어를 알게 된 것도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가을' 앞에 '온전하고'와 '온연한'을 나란히 놓아 '온전하고 온연한 이 가을'이라고 써보았습니다. 그렇게 어제의 가을은 저에게 더 의미 있는 가을밤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바람 중 하나는 아름다움을 잘 마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작은 욕심을 하나 더 포개어 보자면 그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제가 놓쳐버린 단어가 더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아직 제가 눈치채지 못한 표현과, 알지 못한 말들도 많이 있을 것이고요. 앞으로 살아가며 좋은 말들을 더 이상 흘리지 않고 또 많이 주워 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슬픈 일이든 행복한 일이든 '아름다운'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도 '도저하게' 느껴져 막막할 때마다 적절한 말을 잘 떠올려 제 글이 '온연'해지기를 바래 봅니다. 달을 함께 보던 밤 제 조카의 머리에 꽂혀 있던 핀처럼.









글, 사진 :: 임성현

Insta :: @always.n.all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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