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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현 Jan 20. 2024

기억의 안부

가끔은 그 기억들이 내게 안부를 물어봐 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1.

 "성현이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과 '승'이 섞인 듯한 전라도의 발음과 나이가 드셔 살짝 갈라져 있는 음성. 이제는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할머니의 집에 오랜만에 발을 들여놨을 때 부엌에서 어린 손자가 왔는지 확인하는 듯한 그 소리가 분명 귀에 들렸다. 

 "밥을 하도 안 먹으려고 해가꼬 '이거 먹으면 에미 온다, 이거 먹으면 애비 온다' 해야 겨우 밥을 받아 먹는디, 야가 샘키지는 않고 입에만 쟁여 넣고 있다가 재채기라도 하면, 오메 밥알이 입에서 다 튀어 나가가꼬 밥상 앞 장롱에 싹 다 붙었어잉." 

 나도 모르는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던 당신. 이제는 더 이상 들려줄 사람 없는 그 이야기도 할머니와 함께 땅에 묻혔다. 

 살아온 삶에 비해 너무 작은 비석 앞에 섰을 때 할머니의 음성이 바람에 섞여 다시 들려왔다. 

 "강아지 왔냐? 밥을 많이 묵어야 제, 삐쩍 말라 가꼬." 

 네, 할머니. 나이 서른 훌쩍 넘은 강아지, 할머니 보러 오랜만에 부안 왔어요. 그리고 할머니, 저 살 좀 쪘어요.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아무리 자라도 나어린 강아지 대하듯 늘 걱정스럽게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를. 더운 여름이면 나를 당신의 무릎에 눕혀 부쳐주던, 때로는 나에게 와 부딪히기도 하던 부챗살의 그 감촉을. 

 뒤뜰 장독에서 김치를 꺼내고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끓여주시던, 엄마 요리보다 훨씬 더 맛있던  찌개의 그 냄새를. 

 우리 강아지가 커서 선생이 되어서 장하다고, 고생만 한 네 아버지한테 잘하라고. 손자 앞에서 나의 아버지 – 그러나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 당신의 자식을 먼저 걱정하던, 항상 조금은 젖어 있던 그 눈빛을. 

 당신에게서 비롯된 내 감각이 당신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2. 

 "아파?"

 내 부탁으로 해주는 것이면서도 내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며 내 표정을 확인하던 너의 목소리. 엎드려 잠들다가 자세가 불편해 몸을 흔들며 살짝 깼을 때 그 음성을 나는 분명 들었어.

 맞아, 나는 너의 다리를 베고 눕는 걸 좋아했었어. 그리고 그때 네가 내 머리를 만지며 새치를 뽑아주거나, 귀를 파주는 걸 좋아했었지.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단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귀찮은 내색 없이 너는 집중해서 해주곤 했었지. 그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서로의 친구 이야기.

 서로의 가족 이야기.

 서로의 어렸을 적 이야기.

 우리의 지난 추억 이야기.


 내 얼굴과 불과 몇십 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 네 얼굴이 있었지. 나는 너를 올려 보고 너는 나를 내려 보던, 서로의 시야에 서로만 잡히던 그 순간. 그 순간을 감싸주던 많은 것들이 있었지. 

 귀를 파주기 위해 귓불을 잡아당길 때 내가 아프지 않게 살짝만 힘을 주던 네 손가락의, 귀 넘어 흘러내려 내 볼을 간지럽히던 네 머리카락의 - 그 감촉들. 집중할 때 내 귓가에 조용히 스치던 네 숨결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네 배를 만지며 장난치면 간지러워 흘러나오던 네 웃음의 - 그 소리들. 

 그 순간을 감싸주던 많은 것들을 여전히 기억해. 


3. 

 바람이 분다. 그때 나를 부르던 그 순간들은 지금쯤 어디서 불고 있을까? 

 차를 타고 가다 스쳐 지나간 나뭇잎에. 

 땅에 떨어진 전단에.

 공중에 그어진 전선에. 

 무심히 넘긴 책장 사이에. 

 때론 낮게, 때론 높게. 

 어느 날은 선명하게, 또 어떤 날은 희미하게. 

 그렇게 어딘가를 향해 불고 있을는지.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와 내 어깨를 '톡'하고 건드리는 감촉에  뒤돌아봐도 아무도 없을 때 – 그럴 때면 그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지금의 나처럼 여전히 그때를 잊지 못해 많은 날을 돌고 돌아다니다 문득 내 생각이 나서 나에게 안부를 건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그 기억들이 내게 안부를 물어봐 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글, 사진 :: 임성현

Insta :: @always.n.all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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