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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31. 2021

#46 백록당에 온 손님

억수 같은 비를 뚫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백록당을 울렸다.   

   

“마마! 안에 계십니까?”     


누군가 다급하게 그녀를 찾고 있었다.      


“누구냐?”     


홍비가 밖을 향해서 날카롭게 물었다.      


“이부상서 댁에서 시비가 왔습니다.”     


좌승 장렬! 왜?

휘의 얼굴에 문득 의문의 빛이 스쳤다.      

그런덴 정작 백목당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시비를 앞세운 장화영이었다.

분명 왕부에서 아비의 손에 끌려 나가는 것을 보아왔는데, 무슨 일로 이곳을 다시 왔을까?

    

“왕비마마를 뵈옵니다!”     


꼭 술마신 사람처럼 발그래한 뺨과 통통한 입술, 이마 사이에 정성스럽게 그려넣은 꽃잎이 다시 봐도 부자연 스럽게 느껴졌다.      


“좌승댁 영애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가 앞에 나타나자 그녀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여자로서 느껴지는 이 불안감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으니.      


“이번에는 제가 정식 후궁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응당 마마께 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빳빳이 든 화영의 얼굴에 거만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후궁?’

그럴 리가 없다.      


“영애께서 무엇을 잘못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후궁따위는 들이지 않겠다 손바닥 지장까지 찍어 놓고 설마....


“어제 장안에 계신 태평공주께서 황제폐하의 교지를 받으셨습니다! 알고 계셨는지요?”     


 태평공주의 입에서 나왔으니 지금의 황상은 거절할 명분이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옆에 있는 태자나 당사자인 지성이 거부한다면 억지로 후궁을 들일 수는 없을 터인데.      


“마마의 회임을 경하드리옵니다. 앞으로 제가 왕부에 들어와 전하를 보필 하겠사오니, 부디 마마께서는 몸을 보중하시어....”

“그만!”     


휘는 제 앞에서 쫑알거리는 화영의 입을 막고 싶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지 못하겠소! 아직 전하께서는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화영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황족의 혼사가 어디 필부들과 같겠사옵니까? 게다가 괵왕전하 이시옵니다!”

“그래서?”  

   

그녀의 낮은 물음에 화영은 잠시 움찔했다.     

 

“조, 조만간 길일이 정해지면 장안에서 교지가 내려질 것이오니, 마,마마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 여쭈러 오지 않았겠습니까?”     


고양이 쥐 생각!     


“영애의 세심함에 제가 다 감동을 하겠습니다. 그리 제 생각을 먼저 하셨다면 왕부에서 끌려 나갈 일은 없었을 테지요.”     


가뜩이나 붉은 화장으로 벌건 화영의 얼굴은 휘의 말에 더욱 홧홧해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

 자신의 인생에서 칼로 도려낼 수만 있다면 왕부에서 짐짝처럼 끌려 나가던 날이었다.     


“이미 황제페하의 조서가 끝이 난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받아들이시겠지요.”     


휘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기만 하자, 화영은 승리의 미소를 날리며 돌아섰다.

     

“세상에 어느 왕비가 후궁을 들이는 것을 싫어한단 말입니까?”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 그렇다면 전하께서 독단적으로 그런 결정을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화영은 다시 돌아서 휘를 똑바로 쏘아 보았다.      


“그럴 리가 없으시지요! 괵왕비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줄 알고?”

“그렇다면 영애께서 한 번 말씀해 보시지요?”

“못할 게 무에 있겠습니까? 솔직히 마마의 배경이 한미하여, 반드시 세력가와 손을 잡으셔야지요.”

“손을 잡으면?”     


휘는 벌떡 일어났다.      


“이건 이 나라의 병권이 더욱 공고히 일인데, 어찌 마마께서 그것을 반대하시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영애가 후궁으로 들어오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녀의 차분하고 조소 어린 어조에 화영은 볼을 잔뜩 부풀렸다. 화가 났었던 휘는 그런 화영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 옛날, 공을 차기 위해 돼지 염통을 잘라 크게 부풀렸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이 나라의 병권이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괵왕부의 소임이라는 것을 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영애의 말을 듣다 보니, 마치 전하께서 무능하여  좌승의 도움이 없이는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할 것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화영은 부풀렸던 볼을 다시 쏙 집어넣다. 그녀의 눈빛에 ‘아차’의 순간이 잠깐 스쳤다.      


“그것이 아니오라!”

“내가 듣기에도 그리 들리는구나!”     


홍비가 문을 열자 지성이 비에 젖은 비단 옷자락을 툴툴 털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전하!”     


화영은 지성을 보자 환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달려갔다.      


“전하! 아버님께서 좌승에 오르셨습니다. 분명 전하에게 큰 힘이 되실것입니다!”     


지성은 제 팔에 매달려 종알거리는 화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좌승께서 너를 이리 보내셨느냐?”

“아닙니다! 태평공주께서 허락하셨사옵니다.”     


천진하게 화영의 입에서 ‘태평공주’라는 말이 나오자 지성의 한쪽 눈썹이 확 올라 붙었다.

     

“태평공주라!”     


그는 간신히 화를 참아냈다.      


“아무리 천지 분간을 못하는 아이라 해도, 지금 감히 네 입으로 태평공주 운운하며 감히 이 나라의 병권을 말하였느냐!”     


지성이 벼락같이 호통을 치자, 옆에 있던 시비들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렸고, 화영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지금 네 말이 좌승의 뜻이냐!”

“어...어...!”     


너무 놀란 화영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이 만약 좌승의 뜻이라면, 내 이대로 올라가 폐하께 고할 것이다.”

“용, 용서하여 주십시오!”     


무릎을 꿇었던 화영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아버님께서는 제가 이리 온 줄 모르십니다!”

“네가 이리 천지분간을 못하니 좌승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냐!”

“잘못하였습니다. 오라버니! 아니 전하!”     


울먹거리다 말 끝에 기어이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흐음!”     


휘는 한 숨을 크게 쉬었다.

그녀의 한 숨소리를 듣고는 지성이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와 섰다.      


“태평궁에서는 이미 제가 이곳에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지금 후궁 문제 뿐만아니라오.  관리들의 등용문제부터 조세까지 태평궁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성은 피곤한 그녀의 맑고 하얀 낯을 크고 긴 손으로 가만히 쓸었다.

그 모양을 보던 화영은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황제 폐하의 제서가 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휘는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명이라면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아이는 내가 혼처를 찾아 줄 생각입니다.”

“황명을 거역하시려고 합니까?”


장난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기억하오? 여우사냥이 시작됐습니다.”     


황제와 태자, 지성 이 세명의 사냥꾼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종은 공주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 주었다. 끝까지 반대하던 최식이나 소지충같은 인물들은 모두 태평공주의 사람들이었다. 조정이 모두 태평공주의 사람들로 채워지자, 이번에는 벼르고 있던 괵왕의 후궁문제를 들고 나왔다.  황제는 그것도 태평공주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녀의 위상은 끝도 없이 오르고 있었다.

추락이 두려워질 만큼.      




지성의 옆에 이제 막 열 살이 넘었을까한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이 아이는 누구입니까?”

“명광현에서 보낸 시비라오!”

“명광현?”     


휘가 되묻자 소년은 재빨리 그녀에게 무릎꿇고 공수했다.     

 

“장주께서 전하와 마마를 뵙길 청하옵니다!”

“명광현에서 나를 보자 했다고?”

“그러하옵니다!”     


소년은 지성을 보며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볼 일이 있으니 지금 당장 왕부로 들라 전하여라.”     


소년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 후 자리에서 사라졌다.

휘는 지성의 젖은 옷을 받아 걸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두워진 표정. 캄캄히 커진 어둠이 그의 미간에 드리워저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태평공주가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전답문서와 낙양의 상점들이 모두 사라졌어!”

“사라지다니요?”     


지성은 자리에 앉자 마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무후가 낙양으로 수도를 옮겼던 이유도 낙양이 상업의 중심이었기때문이었다. 이곳에 벌어들이는 돈은 모두 황궁의 소유였다. 무후가 죽고, 정변이 일어나도 그녀의 세력이 꺽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낙양의 돈줄을 그녀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수의 범람으로 이천호가 넘는 집들이 수혜를 입은 상태였다. 계속되는 피해와 매년 거두어들이는 세금 때문에 민심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피해를 입은 지역에 조세를 면해주는 정책을 세웠지만 낙양의 민심은 돌아서지 않았다.      


 이유는 낙양의 대부분의 전답과 상업은 태평공주의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아무리 조세를 감면해도 태평공주 소유 땅에는 그 권한이 먹히지 않았다. 그 꼬투리를 잡기 위해 낙양으로 내려왔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태평궁의 이름이 모두 사라져있었다.    

  

그 이름 대신 있었던 것은 백련사 주지 혜범이었다.      


“땡중이 낙양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니....”     


그는 깊은 한 숨을 쉬었다. 곧 조소 가득한 비웃음이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참으로 가지가지...! 권력과 상권을 모두 틀어 쥘 작정이요!”

“괵왕을 가져서 수도의 병권까지 장악하려 드는 것이지요.”     


지성은 웃으며 휘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러곤  도톰하고 촉촉한 휘의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말 다시 돌려주지! 나는 누가 쉽게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오.”     


그의 말에 휘는 부끄럽게 웃엇다.


이지성, 그를 쉽게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태평공주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태평공주의 직접적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욕망은 그냥 정치가들의 권력욕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말 그대로 탐욕, 갖고자 하는 것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꼭 가져야 한다는 것.      


애초부터 무엇을 좋아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갖기만 하면 됐으니,      


“무엇이든 갖기하면 된다라!”   

  

휘는 팔괘를 빠져 나오며 보았던 수많은 어린 아이들의 시신을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그녀의 탐욕은 도대체 어디 까지일까.


“무엇이든 갖고 있다는 것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녀에게는 애초에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니, 오히려 지나친 행복이 불운이 씨앗이 되겠지!”     


지성의 뜨거운 입김이 휘의 붉은 입술을 덮었다. 붉고 따듯한 숨과 여린 살결이 서로 엉기며 붉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숨에서 떨어졌다.      


“사타무의에게 혜범을 잡게 할 것이오.”

“그가 전하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나의 명이 아니오!”

“?”

“비의 말이라면 따르지 않겠소?”     


지성은 걱정스러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예현의 처연한 눈빛이 떠올랐다. 꺼림칙했다.      


“불편합니까?”

“그것이 아니오라,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어야 할 거요. 이제는 진정 홀로 명광현을 지켜야 하니.”     


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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