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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Apr 04. 2024

나인(1)

소설 <PART-two> #착시⑤

“무술년 새해 시작 잘하셨나요? 처음 뵙는 분도 있을테니 제 인사부터 해야겠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모법인 씽의 대표 김승곤입니다”  


승곤이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자 플로어에 앉은 일군의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두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냈다. 두두둑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처럼 손뼉 치는 소리가 무질서하게 한동안 이어졌다. 한방향으로 몸을 열고 앉은 사람들의 옆모습을 향해 나인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벽을 기대고 앉은 나인은 승곤을 바라보고 앉지 않았다. 플로어에 앉은 사람들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는 동안 나인은 고개를 숙인 채 별다른 반응이 없다. 하얀 벽에 닿은 요추뼈 한 부분에서 시린 기운이 느껴졌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구불구불 앉은 청중과 1인극 무대처럼 의자를 두고 가지런히 앉은 승곤 사이에 엉성하게 이어붙인 경계의 자국이 도드라졌다.   


“나인은 내 선 밖에 있어요”


처음으로 공식적 자리에 전신을 드러내고 선 승곤이 워크숍의 시작을 알리는 인사말을 하는 와중에 나인은 얼마 전 그와 나눈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책임 범위 밖의 사람, 대관절 자신은 왜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일까. 좁디 좁은 그의 품 밖에 서서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마냥 나인은 속이 좁아 터지도록 서러움이 몰려왔다. 나인은 그의 의중에 조금더 다다르기 위해 되물어야 했다. 

   

“내 편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승곤은 나인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테이블에 놓인 머그컵 손잡이에 검지를 끼워 들어 올리고는 뜨거운 액체를 한모금, 그리고 또 한모금 느리게 들이켰다. 승곤의 콧등이 잠긴 머그컵 테두리에 걸쳐진 안경에 김이 서렸다 지워지고 다시 서렸다 지워졌다. 김 서린 투명 렌즈 안으로 커튼이 거치듯 순차적으로 드러난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나인을 외면했다. 나인은 그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의 동작 하나 하나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나인의 머리 속에 그의 시간이 째깍째깍 흘렀다. 나인은 그가 만든 정적의 공간에 놓여 상대의 정의대로 새롭게 정립된 관계의 감각에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머그컵에 바닥이 드러날 때를 온 힘을 다해 기다렸다. 


“작년 한해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센터가 설립된지도 벌써 1년 반이 넘어가는데 이제야 여러분들과 이런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법인 대표로써 면목이 없고 죄송스럽다는 말씀 먼저 드립니다. 무술년 새해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함께 무탈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저도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한껏 발톱을 드러내고 첨예해야할 순간에도 공벌레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쟁점과 문제를 온 몸으로 막아내고 결단을 내려야할 순간까지 가능성의 범위를 넓혀 책임을 회피해버리기 일쑤인 의사결정권자. 승곤은 우유부단하지만 포용적 리더십이라는 평을 들었다. 나인은 그런 승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답을 받아내려 하는 몇 안되는 후배 중 하나였다. 뾰족하게 쏘아붙여도 허허실실인 승곤은 말쑥한 태도로 후배에게 점잖다는 평을 듣는 이 영역에 몇 없는 괜찮은 남성 선배였다. 그런 그를 이 영역의 사람들은 대게 좋아했고 그래서 정권의 성향에 따라 주요 관직의 하마평에 종종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나인도 표나지 않게 그를 신뢰하고 따랐다. 좀처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헤매는 사람도 아니고 속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뭐든 품어보려 애쓰는 사람, 무엇보다 그는 수치와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한국사회의 권력구조 내 진입경로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선배였대도 그를 이만큼 따르고 애정했을지 때때로 생각해보면 나인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런 그가 의지만 내면 언제든 공격모드로 태세전환이 가능한 가드를 높이 세우고 후배 앞에 앉아있었다. 승곤이 아메리카노 두모금을 들이키고 무릎에 잠시 두었다가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까지 보고난 후 나인은 처음으로 주제파악이란 걸 한 것이다. 승곤은 곡해된 의사에 대해 애써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오해되도록 두어도 타격 없는 위치에 있었고 불리한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인은 끝끝내 자신의 상사로부터 들어야할 말을 듣지 못할 것이었다. 나인의 눈 앞 승곤의 머리 뒤쪽으로 평평했던 세계가 중앙으로부터 높고 길게 솟구치며 넓은 피라미드 구조로 단단하게 쌓여올라 가는 게 보였다. 너른 세계가 위로 솟구치며 층층이 잠금쇠가 철컹거리며 닫혔다. 견고한 세계가 위로 끝없이 펼쳐졌다. 숨이 막히게 압도당하는 느낌. 뭐든 압도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느껴지기도 한다는 걸 나인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숨이 막히다가 경외심이 들다가 순간 간절히 소유하고 싶다가 드디어 교교히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저것의 위로 올라 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평평한 세계의 여럿 중 하나가 아니라 저 높디높은 구조 상단 유일의 하나로 올라서고 싶다는 생각. 그러다 나인은 현재 자신의 비루한 현실을 현미경 대물렌즈로 들여다보듯 적나라하게 깨닫고 만다. 멋모르고 까불다 어설프게 주인을 문 작은 강아지 같은 자신을. 무딘 이빨에 긁힌 주인의 손은 잠깐 벌겋게 외부자극에 반응했을 뿐이다. 승곤의 침묵의 의미를 나인도 모를 수 없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사람 사이 무게추가 어느 새 한 쪽으로 쏠렸다. 나인은 언젠가부터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나인은 승곤을 만나고 온 후 영영 무성의 존재로 돌아갈 수 없는 걸 깨달은 사춘기 소녀처럼 앓았다. 센터장 C가 사라진지 3주차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나인은 그날 이후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을 것들을 손에 꼽아보기 시작했다. 


“지난 해 우리 센터는 82개 입주기업과 단체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전년 대비 두 배가 넘는 수 입니다. 재작년 설립해 작년까지 총 82개 단체와 기업들의 입주를 돕고 자율적이면서 이타적인 문화를 만들면서 몸으로 직접 부딪혀가며 커뮤니티와 공간 운영의 좋은 사례를 만들어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센터는 그 외에도..”    

    

나인은 센터장 C의 사직소식을 전해 듣고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이 안도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록 몸에 덧난 상처를 계속 건드리는 것 같았다. 센터장 C가 사라진 후 나인은 오랜만에 깊은 단잠을 잤다. 갈등의 씨앗을 뿌리까지 말끔히 뽑아버린 것처럼 3개월여 팽팽하게 지속되던 긴장감이 일순간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쯤에서 이렇게 사건이 종결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금새 누군가로부터 건네 듣는 남의 일 같이 느껴졌다. 나인은 표나게 기뻤다. 그러나 자신과 다르게 당혹스러움 감출 줄 모르는 민지를 보며 나인은 밝아진 얼굴을 표나게 감췄다. 그 며칠동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성급하게 말을 내뱉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홀로 가뿐해진 마음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결론이 나쁘지 않은 사람은 공동행동 네 사람 중 자신뿐인 것 같았다. 총괄 리더 자리의 공백이 길어지자 무책임한 리더십이라고 주억거리던 세간의 이목이 혼란의 원인제공자들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이때도 나인은 사람들이 금방 잊을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그러했으므로.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며 걱정하는 율무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일 거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나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나인은 법인의 사무국장 뮬에게 실장으로 승급 제안을 받았다는 랄라의 말을 들을 땐 홀가분해지지 못했다. 그보다 뒤통수에 전기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 전면에 박하맛 사탕을 덧칠한 것처럼 알싸하게 아려왔다. 질투심인지 섭섭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동공이 흔들렸다. 얼굴과 함께 화제의 방향까지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 것은 철렁하고 주저앉은 가슴이 하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으려 했던 것임을 랄라는 내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 면담을 요청하여 만난 승곤에게 자신에게도 실장 승급 기회를 달라고 간청한 것을 랄라가 영영 몰랐으면 하고 나인은 바랐다. 


“여기 오기 전에 여러분들께서 정리해주신 작년 한 해 센터 성과 보고서를 샅샅이 살펴봤어요. 티가 나지요? 숨이 다 찰 정도로 많은 좋은 일들이 있었더라군요. 이 적은 인원으로 그 많은 일을 했다니 정말 대단했다고 서로를 많이 칭찬해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궂은 일 마다하지 않았던 여러분들 덕분으로 이 어려운 과제를 큰 사고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값진 수고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나인은 그녀의 소중한 친구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자기 자신에게 고백을 하고 난 후 애초에 자신이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에 대해서도 꼬집어보기 시작했다. 애초에 승곤의 지시를 받은 뮬이 랄라를 만났다는 걸 자신이 몰랐더라면.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뒤바뀌어 주변 여론이 좋지 않다는 승곤의 걱정을 랄라를 통해 전해듣지 않았더라면. 학생운동을 했던 랄라와 자신이 다른 성분으로 승곤에게 똑같은 후배가 아니었다 라는 걸 몰랐더라면. 이곳이 다른 세계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성분 투쟁의 장이었던 것을 차라리 몰랐더라면. 이 모든 것을 차라리 몰랐으면 하고 나인은 생각을 했다. 그러므로 나인이 할 수 있는 건 애초 알지 못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말끔히 기억을 지워내는 것이다.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 까마득히 잊는 것이다. 나인은 어디서부터 자신의 기억을 지워내야할지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나인은 두 다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올린 두 팔에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기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모두발언을 하는 승곤의 옆으로 물러선 뮬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있다는 걸 나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커버사진: UnsplashEugene Tkachenko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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