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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Apr 29. 2024

청사진

소설 <PART-TWO>#지형⑥

나인은 행사의 주최자인 것처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행사장 중간 어디 즈음에 앉아있다. 문짱은 행사 시작 직전 무대에 올라 시급하게 시로 복귀해야할 일이 생겼다고 청중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황급히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행사 관계자들이 우왕좌왕거리는 모습이, 그들에게 감정이입된 나인의 눈에 어김없이 들어왔다. 문짱은 S시립연구원장과 함께 H교수의 발제 뒤 마련된 토론회 패널로 참여하기로 되어있었다. 이 단지의 실질적 방향키를 쥐고 있는 총괄책임자로써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터라 그의 등장을 고대하는 이가 적지 않았을 거였다. 그러므로 당황한 쪽은 그 누구보다 이 쪽 청중들이다. 나인은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응급한 일정이 불쑥 끼어들 형태의 업무도 아니었다. 토론 준비가 미처 안되었던지 그게 아니라면 행사 주최자의 입장에서 만듬새가 영 성에 차지 않은 것인지 하여간 무엇엔가 부에가 나 자신이 어떤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인줄도 까맣게 잊고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쓰고 이 치욕의 장소를 황급하게 도망쳐버린 것이라고 나인은 생각해버렸다. 쑥대밭이 된 것이 행사장인지 자신의 머릿 속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만 머릿속을 실타래로 돌돌말아 정리하듯이 나인은 자신에게 이득될 것도 없는 패를 쥐고 이것저것을 점쳐보았다. 그 사이 단상 위로 H교수가 반듯하게 올라섰다. 박수를 치는 둥 마는 둥 문짱의 떠나던 뒷모습 너머의 사정에 그녀는 온통 정신이 나갔다. 나인은 엊그제의 일을 상기시켰다.


미래를 준비하는 산업단지라는 서브타이틀이 붙은 창의테크밸리는 꼭 망망대해 위 부표처럼 떠 있는 곳처럼 보였다. 설치 목적은 불분명 했고 목표는 까마득히 가닿지 않을 만큼 드높았으며 청사진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채였다. 시장 Y가 이전 시장의 개발계획을 엎고 이곳을 미래를 선도할 혁신 비즈니스 생태계로 만들겠다고 발표한 때가 재선에 성공하고 취임 100일째되던 날이었으니 그로부터도 2년반이 흐른 것이고 센터 개소하고도 6개월여의 시간이 경과하고 있었다. 센터 개소일에 맞춰 산업단지의 상과 구체적인 실행방향을 대중에게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준비 미흡으로 미루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상태에서 개소 반년만에 반강제로 다시 잡힌 이날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문짱의 성에 차지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날은 기필코 왔다.


연말 행사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배치되어 있는 단지 운영 계획 발표를 이틀 앞두고 센터장 K가 최종 발제문을 문짱에게 최종 보고하는 날, 당연히 그것은 문짱이 기대하는 눈이 떠질만큼 새롭고 놀라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센터장 K는 이날 보고자리에 법인에서부터 센터 위탁 제안서 작업을 함께 해온 나인과 랄라를 포함하여 센터의 실장 세사람을 모두 배석시켰다. 문짱은 센터장 K의 말을 차분히 듣는 듯 하더니 그의 보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투정하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꽤 격양된 목소리로 한참을 떠들어댔는데 아무도 그에 말에 반박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누가 보면 꼭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들마냥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꼼짝없이 그의 말을 한참 듣는 꼴이 되었다. 문짱은 센터장 K의 발제내용에 대하여 관련 산업에 이해관계로 엮일만한 사람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아 현장감이 없고 주목해야할 사회트렌드나 현상에 관한 실행그룹의 진정성 있는 고민도 느껴지지 않으며 어느 사업계획서를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수준 같다고 평가절하했다.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 생각도 하지 못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앉아있었던 까닭은 문짱이 이 계획서를 면밀히 살펴보고 조목조목 따져 묻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 누구도 이 일의 책임을 나눠지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컸다고 나인은 짐작했다. 자신 역시도 그러했으므로. 그러나 나인이 보기에 제일 책임지고 싶지 않아보이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문짱이었다. 그리고 그는 센터장 K가 가져오는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으로 처음부터 앉아있던 사람같아 보였다. 나인은 보고자가 센터장 K가 아니라 다른 이였더라도 문짱이 저런 반응을 보였을까 실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참 격양된 목소리를 말하고 난 후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어느 덧 그는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처럼 그러고도 몇 분을 혼자 떠들어댔다.


문짱이 센터장 K에게 일을 맡기게 된 결정적 이유는 어쩌면 공공공간 기획자 J 때문일 거라고 나인은 자주 생각했다. 소규모의 문화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는 기획자 J 는 자유분방한 프레젠테이션 스타일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시장 Y의 눈에 들어 시 전략 사업 곳곳에 기획자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탁월한 기획자로 인정받아 소위 어쩌다공무원도 될 뻔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는데 그 이유 역시 그의 조심성없는 언변 때문이었다. 거기다 비용처리 문제가 컸다는 소문도 있었다. 개인사무와 공무별 비용이 엄연히 유별한 것인데 아무리 작은 사업체라도 경영을 하는 사람이 회계처리를 방만하게 한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저러다 일 한번 낸다고 쯔쯔 거렸다. 그래서 그와 비즈니스 협업할 때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할만한 일인지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이 바닥 요주의 인물 중 하나였다. 하물며 세금을 사용하는 공공행정사무에 있어 그것은 꽤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비토 사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짱이 창의테크밸리 조성과 운영의 총괄관리자로 그를 1순위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시장 Y가 창의력으로 반짝거리는 그의 스타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FM의 모범생 기질에 시장 Y의 눈에 자신과 정반대 스타일의 그는 꽤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거였다. 건축전공자에다 다양한 문화기획 경력까지 고루 갖춘 기획자 J와 같은 멀티플레이어가 이 바닥에 잘 없기도 했다. 문짱은 한동안 자문회의 라는 형식을 빌려 그를 자주 만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와의 교류를 끊어버렸는데 그건 그가 창의테크밸리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고 스스로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작은 자극에도 얇팍하게 벌벌 끊어버리는 시끄러운 바닥에서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업이었다.


현 시정의 전략사업인만큼 최종결정권자인 시장과 이해가 맞닿아야 했고 더불어 추진력 있게 일을 밀어붙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지만, 시 행정 특채로 들어와 마땅한 소임과 책임을 져야 하는 역할이었기에 누가보아도 자격이 되는 인물인지를 검증하는 순서가 그 모든 것에 앞섰다. 자격 여부만 통과하면 되는 자격 심사 과정은 불가피한 절차였고 그 과정을 거치기 전에는 서로 간 없던 일인 듯 조심이라도 하는 것이 이 바닥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 모두는 객관과 공정이라는 허구와 본질의 선후를 전복시켜버리는 절차적 자격이라는 잉여로움에 몹시 실증이 나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닥의 질서와 생리에 어긋나는 것에는 가차 없었다. 사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어그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문짱은 별다른 설명 없이 기획자 J 와의 소통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다행히 그는 문짱의 무신경함에도, 닭 보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는 사람들의 비아냥대는 말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후 문짱이 기획자 J를 대체할 인물로 그와 대척에서 극도로 조심성이 많은 센터장 K를 선택하였다는 가정을 나인은 쭉 하고 있었다. 적어도 센터장 K가 그런 돌출행동은 하지 않을 인물인 건 확실했다. 그가 딱 적임자라고는 생각지 않았을거였고 다만 자신의 지시대로 성실하게 물건을 만들어올 인물이라고는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나 문짱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있으니 센터장 K가 자신의 언어를 외국어마냥 낯설어한다는 것이었다. 기획자 J 와 같은 창발적인 사람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는 문화와 룰과 조건을 생각해보라는데 센터장 K는 자꾸 크리에이터들의 성장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짜오고 있었다. 생태계를 넓히는 청사진을 그려오라는데 자꾸 센터라는 단지 관리 조직의 운영계획을 짜오고 있었다. 나인은 벽과 벽이 결론 없이 부딪히는 장면을 몇 번째 목도하고 있는 것인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어느 한쪽이 산산히 부서져 끝장나는 것이 더나은 결론 같았다.


H교수는 발제를 하다말고 팔짱을 끼고 자신의 오른편으로 몸을 돌려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가 충분히 깜깜하지 않아 영상은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빠르고 현현하게 흘러갔다. H교수가 발제 중간 청중에게 공유한 영상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삶의 필요조건들이 낱낱이 파괴되어 가고 그로 인하여 가중된 인류의 고통이 시대 흐름별로 보여지는 짧은 애니메이션 클립이었다. 대사는 없었고 한 명의 인간으로 표현된 제국주의는 키가 작고 코와 몸이 둥근 남성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나인은 영상을 잠시 보는 듯 하다가 H교수의 구부정한 상체로 시선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에서 문짱의 사회적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H교수는 문짱을 소위 시민사회운동 진영으로 끌어들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사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다음세대를 위한 새로운 대안운동을 모색하고 실천해온 현장지향형 연구자로 평가되어 왔으며 문짱의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시장 Y의 재임 후 성과를 보인 다양한 창조적 시민들의 공공참여를 추동하는 S시의 시민참여 정책이 전국적인 주목받으면서 그녀는 더욱 바빠졌다. 그녀는 이 새로운 의제를 논하는 자리에 초대되는 대표적인 사회운동가이자 연구자로 소개되며, 각종 TV 토론프로그램 패널로 자주 등장하는 이 바닥에 몇 없는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나인은 그녀를 전 직장인 주민자치센터에서 두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H교수는 당시 시의 민관 합동으로 만든 주민자치 거버넌스 위원회의 최고 수장격인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나인에게 그녀에 대한 기억은 일의 추진을 위하여 공무원들이 이슈를 뾰족하게 만드는 토론 와중에 그 이슈를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해체시키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뒤 문짱이 만드는 자리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던 그녀를 나인도 벌써 세 번째 마주하고 있었다. 나인은 그녀를 마주할 때면 때때로, 그녀의 사회활동이 부유하면서 동시에 의식 있어 보이고도 싶은 어느 부르주아 여성의 새로운 취미활동 같다는 생각을 남몰래 했다. 문짱의 지시사항은 꼭 H교수의 강의와도 같았고 꽤 많은 순간 스티브잡스 같이 남다른 잠재성을 가진 단 1% 특출난 사람을 정책 대상자로 상정하고 펼쳐야할 사업 같았는데 그래서 창발적 소양을 갖춘 소수의 리더 그룹을 발굴하여 키우자고 하는 것이냐고 따져물으면 그는 불쾌한 얼굴로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답하곤 했다.


행사 시작 30여분이 지나 나인은 머릿 속 꼬인 실타래가 더욱 꼬이는 기분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또다시 조용히 되뇌였다.


‘터가 좋지 않다’    


커버 사진: UnsplashRendy Novantino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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