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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Apr 25. 2024

중정

소설 <PART-TWO> #지형⑤ 

랄라는 문짱의 돌출행동으로 혼란에 휩싸인 행사관계자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행사장으로 헐레벌떡 들어섰다. 모두는 한동안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행사가 한동안 지연되는 탓에 행사장 안은 어수선했다. 본의 아니게 행사장 앞쪽으로 들어선 랄라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빈자리를 찾았다. 빈자리는 듬성듬성 보였다. 적당한 앞자리를 찾던 랄라는 양 옆자리가 비어있는 네 번째 열의 세 번째 좌석으로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다. 의자 위에 놓여진 얇은 리플렛을 들어 올리고 자리를 잡아 앉고서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작게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센터장 K는 본 행사와 관련 없는 직원까지 빠짐없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센터장 K의 창의테크밸리 운영 계획 발표 순서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 해 사업을 마무리하는 시즌인 탓인지 사무실 분위기도 영 들떠있었다. 업무시간 중 꽤 자유롭게 시간을 운용할 수 있는 온종일 행사였으나 적극적으로 참여의사를 밝힌 센터 직원은 별로 없었다. 랄라의 시야에 알만한 얼굴들이 쉬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대를 바라보고 빼곡히 의자만 쭉 놓여진 청중의 좌석은 두툼한 겨울외투까지 입고 앉은 사람들 때문인지 조금 비좁았고 제법 꽉 들어차 보였다. 지하철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느라 숨이 조금 차오르는 걸 달래며 왜 이토록 열심히 걸어왔는지를 생각했다. 랄라는 조금 허기짐을 느끼며 리플렛을 펼쳐들었다. 늦잠을 잔 탓에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던 두유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랄라는 리플렛을 펼쳐보며 ‘이런 게 문짱의 스타일인가?’하고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마구 뒤섞인 느낌이었다. 예술 작품이 툭툭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두루뭉수리한 주제를 가지고 담론을 설파하는 자리 같기도 했다. ‘뭐 아무렴 어때. 내 일도 아닌데’ 랄라는 오랜만에 실무 부담에서 벗어나 남의 행사장에 앉아있다 갈 생각에 마음이 조금 낙낙해졌다. 랄라는 군중 속 좌석에 앉아 해방감을 느꼈다. 행사의 주최자가 아닌 참여자로 행사장에 앉아있기는 오랜만이었다.   


리플렛 첫 장에는 ‘인류와 나란히 걷는 기술, 함께 맞는 미래’ 라는 글자 밑에 크게 ‘2016창의테크서밋’이라고 쓰여있었다. 창의테크밸리 곳곳에서 5일 동안 진행되는 이 행사는 계폐막 프로그램을 비롯해 주제별 토론세션, 공간 기록 전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도 적혀있다. 랄라가 참여중인 이 프로그램은 행사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세션으로 오전과 오후세션으로 나뉘어 진행될 예정이었다. 오전에는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전환의 시대를 맞으며’ 라는 주제로 S대 H교수의 기조발제와 토론이, 오후에는 10개의 키워드별 컨퍼런스에 이어 마지막 공식 일정인 창의테크밸리 운영과 조성 계획에 관한 2개의 발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를 겸한 비공식 리셉션 행사를 끝으로 마무리될 이 날의 행사에 랄라는 센터장 K의 운영계획 발제를 듣기 위해 참여한터라 꽤 장시간 행사장에 머물러 있을 계획이었다. 랄라는 첫 날 행사 모니터링을 자청했다. 단지 정문에서 경비실 다음으로 가까운 건물인 U동의 꼭대기층인 3층 어딘가에 0.3평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 랄라는 행사가 지연되는 연유도 모른 채 가쁜 숨을 골랐다. 랄라는 외투에서 가만히 두 팔을 빼고 자락을 여미며 얇아진 몸을 감싸안았다. 몸이 의자 아래로 푹 가라앉으며 이윽고 호흡의 감각이 잊혀졌다. 합법적으로 조퇴를 얻어 당당히 교문을 나설 때 아픈 몸이 다 나은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던 순간처럼 간만에 심정적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랄라는 오랜만한 편안한 낯선 얼굴을 하고 어수선 사람들의 속도를 피해 자신의 오른편 냉기 가득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3층까지 뻗은 중정의 목련나무의 잔가지들이 반대면의 공간에 겹쳐보였다. 그 위로 창창한 B산의 봉우리가 시리게 보였다. 


랄라가 머무르고 있는 U동은 중정이 있는 미음자 형태의 3층 건물이다. 1층에는 우체국 출장소와 관리사무실이 공간 내부 수선 이전부터 자리를 잡았고 2층에는 임대용 오피스가 모여있다. 마지막 층은 가변형 칸막이로 열고 닫아 공간 규모를 변형할 수 있는 대형홀과 주방시설, 몇 개의 미팅룸으로 구성된 이벤트용 공간으로 마련되었다. U동은 짙은 검회색의 철골 구조물을 덧댄 외벽의 모서리 양측으로 출입문이 나 있고 입구에 들어서면 입구와 같은 방향으로 각이 진 모서리 유리창으로 커다란 목련나무가 가득히 보이는 중정 구조로 되어있다. 처음 이 동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 중정을 보며 감탄을 했다. 육중한 철골구조에서 풍기는 경직된 외관과 다른,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3층 높이 까지 뻗어선 커다란 목련나무 한그루만이 가득하게 서있는 이 중정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입구와 반대쪽 편으로 치우쳐 자리한 목련나무는 봄이 되면 옅은 분홍빛 목련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며 50여평 남짓의 중정 가득 매웠다. 이 풍경이 오묘해서 꼭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착시를 사람들에게 선사했다. 랄라는 그러나, 이곳에 들어서면 수선 이전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불과 1년전만 해도 이곳에는 좀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온통 회색빛이던 이 건물은 꼭 한참 버려져 사용하지 않는 폐교처럼 그로테스크했다. 숨겨진 이 중정에는 누군가 몰래 버리고 간 폐가구와 생활쓰레기 더미가 곳곳에 돌탑처럼 쌓여있었다. 덩그러니 선 이 목련나무는 서낭당의 신목처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피웠던 꽃잎을 모두 떨구고 빈가지로 긴 시간 동면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출입구에서 가까운 양면을 제외하고 대칭을 이루는 두 면으로 들어찬 공간들은 사용할 수 없도록 바깥으로부터 자물쇠로 잠겨졌다. 닫힌 문에 난 작은 네모창 너머로 내부공간을 들여다 볼라치면 형무소 전시실 내부를 들여다볼 때처럼 가슴이 쿵쾅하고 울렸다. 내부는 꼭 괴기스러움을 전시하듯 가구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카펫 깔린 바닥은 습기를 오랫동안 먹고 얼룩덜룩해졌다. 버려진 방들과 나란히 1층에는 관리사무실과 우체국 출장소가 운영되고 있었고 2층에는 회계업체 하나가 임대해 공간을 사용하고 있었다. 랄라는 그때의 공존이 가끔 실제였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는 관리사무실과 우체국 출장소가 남아있었고 2층에는 청소년 지원 단체 등 8개 단체가 새로 임대를 얻어 들어와 있었다.  



랄라는 어느 덧 외투 안으로 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1년만의 변화라곤 믿기 어려운, 격세지감을 느끼며 가당찮은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흐릿하게 웃었다. 그 때 예정된 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나 H교수가 기조발제를 위하여 단상 위에 우뚝 올라서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단에 오른 까닭인지 H교수는 예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노쇠해보였다. 그녀는 대략 30㎝ 정도의 낮고 넓은 무대에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H교수의 상반신이 앞사람과 앞사람의 머리 위로 올려다 보였다. 무대의 오른쪽으로 대형스크린이 천장에서부터 내려와있고 왼편에는 그녀가 앉을 의자가 놓여있다. 그녀는 S대 사학과 교수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마터면 35년 동안 재직했던 사학과가 아니라 다른 학과로 퇴직을 맞을 뻔했다. 취업과 거리가 먼 비인기 학과로 통폐합될 위기를 간신히 넘긴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사학과로 퇴직하는 마지막 인물이 될지도 몰랐다. 얼마 못가 그것은 역사콘텐츠학과 등의 명칭으로 바뀌어 불려질 거였다. 랄라는 어쩐지 그녀의 발제 주제와 그녀의 처지가 맞닿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H교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지 않았지만 여성단체 활동을 경유한 랄라에게 그녀는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젠더의 역사나 여성의 시민성 등과 같은 과목을 개설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학교 밖에서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과 협업하며 실천 연구를 해온 연구자로 알려져있다. 그녀는 혐오의 언어를 양산하는 편협한 이분의 구도에서 비껴서 성차의 억압 구조가 양산하는 사회문제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해왔다. 그 중 하나가 돌봄의 사회화 였다. 그녀는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동육아나 대안교육, 커뮤니티케어와 같은 모델이 제도적으로 자리잡기 이전부터 합의의 언어와 대중 실천 과제를 제시해온 인물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회적 돌봄의 어머니 라는 호칭을 듣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랄라는 남모르게 반발감을 품었는데, 그건 그녀의 활동이 중산계급 운동 같다고 폄훼되는 몇몇 이들의 평가와 맞닿아 있기도 했다. 랄라에게 H교수의 방법론은 때때로 간지러웠고 아주 자주 세상물정에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뭐든 쉽게 용서할 줄 아는 우월적 지위에 선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그녀가 가진 지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그녀의 활동 자체가 그렇다는 것인지는 도마 위 무를 반토막 쳐내듯 갈라지지 않았다. 하여간 그녀의 활동은 랄라가 보기에 배알이 꼬이도록 우아하고 근사하게 보였다. 여전히 세상의 이진법이 관념과 관습과 제도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더욱 그 억압의 맹위를 사납게 떨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순의 질서를 엎고 변화를 꾀하는 방식이 그다지 평화롭지 않을 수 있었고 때때로 문제의 본질은 첨예한 갈등 속에서 더 잘 드러났으며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간혹 잘못된 언사와 뿌리 깊은 구조를 피부가 아리도록 꼬집고 단죄하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풀려나갈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변화, 혁신, 개혁, 그 말들은 근사했지만 실제는 스스로 몸피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 같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에 차라리 가까운 일일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그녀의 방법론은 언제나 문제의 핵심에서 살짝 비켜 서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녀의 일을 나는 나의 일을 하면 될 것을 알면서도 랄라는 콤플렉스에 휩싸여 단상 위에 올라선 H교수의 여유로운 얼굴을 치켜뜨고 바라보았다. 그녀만 보면 왜 이토록 비위에 안맞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서였다. H교수가 등장하자 장내의 소란도 일거에 멈춰섰다. 강단 위에 선 그녀가 동영상 하나를 보고 강연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것이라고 자신의 오른편 스크린으로 청중의 이목을 유도했다. H교수의 손가락을 따라 랄라의 고개가 대형스크린쪽으로 돌아갔다.  


커버사진: UnsplashRoss Sneddon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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