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빈조 Apr 18. 2024

공백

소설 <PART-TWO> #지형③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이에요. 국가기관이 빠져나가면서 생긴 물리적 공백은 도시 중심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주변화되어 있던 다양한 종들에게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새롭게 활동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산업과 문화가 발생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와 같은 사회적 재난상황에서 일상회복과 안전을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공간이어야 하구요. 한국사회 새로운 의제가 발화되는 곳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의 이종교배로 만들어지는 온갖 창의적인 발상들이 넘쳐나는 곳이며 끊임없이 시도하는 사람들의 창조적 공유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100명의 집단지성이 기성의 것들을 낙후시키는 공간이 될 겁니다. 차별은 없지만 경험은 존중된다는 신뢰가 있는 공간이고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과 자원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문제 해결의 실험과 지속가능한 실행이 가능한 곳이죠”


나인은 문짱의 장황한 말을 여과없이 흘려들으며 자신 앞에 성실하게 앉아만 있는 주무관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녀는 아랑곳없이 나인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웠다. 테이블 아래 건들대는 다리의 진동이 불량하게 서있는 상체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몇 차례 미뤄지던 센터 개소일이 6월로 못 박히고 오픈 행사에서 공개할 센터 운영계획의 내용을 두고 시와 센터의 실팀장급 주요 인물들이 모여 운영계획서를 검토하는 자리였다. 어느 시점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국장의 담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나인은 앞자리의 그녀에게 완전히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른편 상석에 앉은 상사에게 심드렁한 얼굴을 훤히 드러내놓고 왼손으로 대담하게 턱을 괴고 앉아있다. 오른손으론 턱 밑 테이블 위 일체 넘기지 않은 채로 놓인 문서 표지에 의미없는 낙서를 긁적거렸다. 전혀 딴세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인은 회의 후 그녀가 팀장 승진을 앞둔 혁신기획팀 실세 주무관이라는 이야기를 센터장 K에게 전해듣고 놀란다.  


“... 누군가는 시장님 같은 사람 천 명 정도를 양성해내는 일이라고도 하던데 뒤집어 말하면 공동체의 신뢰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 성장하는 시민들의 두꺼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구호와 구조에 압도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북적거리는 공간이자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협력하며 한국사회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되려면 느슨한 마스터 플래닝과 동시에 강력한 디렉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사람에게 호기심을 잃은 나인은 이제 테이블 자리에 앉지 못하고 국장실 벽면에 의자만 두고 기대 앉은 너댓의 공무원들에게로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정작 나인이 시선을 둔 곳은 전면이 유리로 된 통창이었으므로 이들은 나인의 뒤쪽에 앉아있다. 그들은 이 테이블을 무대처럼 쳐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동상이몽의 현실을 무덤하게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나인은 환각처럼 무대공포를 느꼈다. 목에서부터 얼굴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낀다. 나인은 이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육중한 원목 테이블 너머 도열해 앉은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본다. 양쪽으로 총 열 명의 사람이 도열한 테이블 상석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문짱이 앉았다. 나인은 무대 위 시연자처럼 그를 바라본다. 그는 삐딱하게 앉아 연신 입을 놀리고 있다. 그의 말이 아득히 멀어진다. 그는 사실 예상치 못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다. 시장 재임 2년이 지나도록 그는 겨우 단지를 운영 관리하는 센터 하나를 설립했을 뿐이었다. 가시적 진전이라고는 그것뿐인데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운 리더십인 센터장 K가 못마땅해 그러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거기다 문짱은 전임 국장이 억 단위의 용역비를 들여 세워놓은 마스터플랜을 책상 위에 받아들고 혀를 내두르고 있을 것이었다. 대규모 산업단지의 운영 전략을 한참 구상중이던 문짱은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망연자실해졌다. 전임 국장은 전 시장 체제에서도 인정받던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으로, 신임 시장에게 발탁되어 초대 창의혁신국장에 임명되었다가 시장 재임 직후 시 바깥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대외적으로는 위로 얼마 안남은 고위직 자리로 승진하면 은퇴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어 이를 늦추느라 자리를 옮기는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시장을 피해 외곽으로 피신한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전임 국장이 세워둔 마스터플랜은 업무시설을 비롯하여 지상 16층 규모의 숙박시설과 아케이드, 가족 대상 대형 복합문화시설을 세우는, 공사비 2,200억원과 사업비 1,300억원이 드는 대형토목사업으로 짜여졌다. 공사는 다섯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며 총예산의 10%를 1차년차에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해 3년차에 정점을 찍었다가 5년차에 마무리되는 것으로 적혀있다. 굵직한 용도만 나열해 시의회 통과용으로 만들어진 문서였음에도 문짱은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애초에 책임질 생각도 없는 사람이 마스터플랜까지 짜두고 도망친 것”이라며 “시장의 정책에 재 뿌릴 의도가 아니라면 이럴 수 없는 일”이라고 전 국장의 행태에 대해 허공에 대고 노발대발 성을 냈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소위 늘공(5)도 예외 없이 듣는 말이었다. 늘공들은 못 알아듣는 척 하거나 무심히 흘겨 넘기는 것 같았지만 실상 뒤에서는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바빴다. 


문짱의 불평도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 1억이 넘는 예산을 들여 짜놓은 최상위의 계획서를 실행조차 해보지 않고 손바닥 뒤집듯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다시 예산을 들여 제2의 마스터플랜을 짤 수도 없었다. 어쩔 도리 없이 현존의 마스터플랜을 따라 사업을 추진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문짱은 그럴 사람도 못되었다. 정도가 어려울 땐 꼼수가 약이었다. 문짱은 단계적 조성이라는 말은 그대로 두고, 일부 전면철거 후 신축 외 다른 트랙으로 일부 공간의 경우 실제 공간을 활용할 사람들이 활용하면서 필요에 맞게 바꿔나가는 형태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지금의 마스터플랜 대로라면 5단계로 공사가 진행될 것이었고 1단계에서 일이년의 시간을 버는 차선책이었다. 지금의 계획대로 전면철거 후 재건축 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지연시키고 1~2년 내 소기의 성과를 만든 후 새로 마스터플랜을 짜는 전략이었다. 시장님이 듣고는 무릎을 치셨다고 알려진 이 꼼수는 언뜻 듣기에는 꽤 그럴듯한 것 같았지만 나인은 금새 어림도 없다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센터 하나 만드는데도 2년이 걸렸는데 2년 내 소기의 성과라니 나인은 쳇 하고 코웃음이 나는 걸 황급히 주어담는 것 같이 코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 지역의 민원들을 개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의 과정으로 만들어내어야 해요. 자기충족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나 영토만을 확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배제되도록 문화와 시스템을 만들어가야 하구요. 이 곳은 오래 정주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짧게 머무르고 교류하고 흘려갈 수 있도록 역동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획되고 구상된 것들이 실행으로 연결되어 사회적으로 유통될 수 있도록 루트와 프로세스 설계가 우선이구요”      


나인은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자신의 왼편에 앉은 랄라가 그 옆자리에서 다리를 덜덜 떨고 앉아있는 센터장 K의 오른쪽 다리를 의식적으로 툭하고 치는 걸 목격했다. 한도 넘게 떨리던 센터장 K의 다리가 한순간에 멈춰섰다. 동시에 그는 테이블 위 겹쳐 올려놓은 양 손의 위 아래를 바꿔 놓았다. 이 테이블에서 바른 자세로 내내 앉은 사람은 센터장 K 뿐이다. 그는 쫓기는 기분으로 자신의 VIP 고객인 문짱을 상대하느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상석에 앉은 이의 재가를 받은 뒤 반년째 줄곧 쫓기는 신세다. 작년말 위탁기관 선정 공고의 입찰 참가를 시작으로 조직 세팅과 입주기관 모집, A동의 수선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 독촉 받고 있는 단지의 중장기 성공 전략을 쥐어짜면서 당장 올해 하반기 센터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더해 오픈 행사까지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니 주어진 시간은 어김없이 부족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질 없이 일을 진행하라는 미션을 하달받고 있다. 머리 속이 뒤죽박죽인지 센터장 K는 자주 멍을 때렸다. 아마도 그는 현재도 그런 상태일 것이다. 그의 비틀린 몸은 상석의 그 분을 향해서 앉아 있으면서도 엄격했던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과도 같은 문짱의 얼굴을 끊임없이 외면하고 있을 거였다. 그가 원하는 ‘압도적인 결과물’에 압사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눈 앞이 캄캄해졌을 거였다. 


이순간 나인은 그만 이라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문짱의 말이 드디어 과하게 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순간 무대 아래 관객 이라는 자기객체화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나인은 되뇌였다. 이렇게 다같이 고통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 건 아무도 보지 않을 공연에 더 가깝다. 나인은 랄라의 얼굴을 살피고 싶어져 고개를 휙하고 돌렸고 랄라는 꿈쩍도 않고 옆 얼굴인 상태로 굳건히 앉아있다. 그녀는 진지한 것인지 지루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나인이 다시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을 때 테이블 위 상체만 둥둥 떠있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선으로 길어져 있었다. 어떤 것이 자신인지 또 랄라인지 선뜻 알 수 없을 만큼 다 고만고만한 검은색이다. 나인은 그것이 한없는 정지상태의 그림처럼 길게 기억에 남았다.  


(5) '늘 공무원'의 줄임말로, '어쩌다 공무원'의 대비되는 말로 공무원 시험 등 임용절차에 따라 공무원 신분을 부여 받은 공무원을 지칭하는 말이며 '어쩌다 공무원'은 선출직 또는 선출직 공무원과 함께 특별채용되어 한시적으로 공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을 뜻한다.     


커버사진: Unsplashsteph washi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