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소설 <PART-마지막> #증후 ④

by 수빈조

나인은 그래서 세번째 모임만에 승곤이 좀 음흉한 사람이라는 생각했다. 다섯번째쯤 보았을 때는 점잖고 신중한 혹은 우유부단한 사람인가 보다 했고 다같이 MBTI를 해보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된 일곱번째 모임에서는 눈 앞의 기회 보다 일의 본질을 중요시 하는 사람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가 마지막 모임에서야 나인은 드디어 그가 일을 진척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인은 주민자치센터를 다니면서 일과 후 호출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이 모임에 나갔고 결국 승곤이 새로 만든 조직에 참여하기로 하는데 그건 일에 매몰되었다가도 업의 의미를 되돌아볼 기회가 꾸준히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해서였다. 겉으로는 날로 변화하는 시민들의 니즈를 반영해 사회의제를 세팅하고 의제별로 새로운 대안운동과 시민활동을 제안하는 시민사회연대체을 표방하면서 동시에 시민사회진영의 정치세력화와 제도정치로의 진입이라는 미션을 품은 이 조직의 속성과도 같이. 수면 아래 모래바닥 깊숙히 반짝거리는 그 무언가에 끌려서였을 거였다. 그래서 나인은 가끔 이 사전모임과 새로 만들어지는 조직이 꼭 언더조직처럼 느껴졌다. 슈트를 짓는 양장점 간판을 걸고 실제는 가치와 신념으로 똘똘 뭉친 특수요원들을 훈련하고 지원하는 비밀조직에 드나는 기분이 들었고 그건 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같은 것이었다.


“나인 도대체 왜. 아니 왜 한다고 한거에요?”


왜 라고 물으니 나인은 머리 속이 늦가을 낙엽처럼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나인은 랄라의 시선을 피해 왜 라고 몰래 말해보았다. 소리도 없이 입이 동그랗게 오므려졌다 떼어졌다. 왜 라는 단어엔 설명의 의무가 없었다. 좋아서, 싫어서, 하고싶어서, 해야하니까 라고 단답형으로 말해도 괜찮은 부사이자 감탄사. 나인은 이 단어의 편의에 감사하며 한편 앞 뒤 사정을 생략해도 된다고 허용해주는 것일지 앞 뒤 사정 필요없고 정해진 답을 말하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인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나인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면 어땠을까도 생각해야 했다. 올해가 50일도 남아있지 않았다. 프로젝트의 종료기한도 한 달 반 남짓 남아 있는 꼴이었다. 명분도 없고 과정도 제대로 밟지 않아 이미 꼬일대로 꼬여버린 일. 입주기관들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대규모 사업을 진척시키고 있다고 성화였다. 기한 내 사업완료는 이미 어려웠고 서류상 예산집행과 준공처리를 12월말로 완료해두고 실질 준공은 1월말로 미루는 이면합의가 불가피했다. 용역비를 전부 지급받은 용역업체와의 선후와 갑을이 바뀐 아슬아슬한 거래가 예정되어 있었다.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쓰레기처리와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나인은 오히려 복잡했던 마음이 단순해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 해야할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해치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다시 쌓일 걸 알면서도 비가 오기 전에 낙엽을 치워야 하는 그런 일. 유감스럽게도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닐뿐. 사고는 처리하고 보자. 그 누군가가 내가 아닐 수 없었다.


“제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요”


등을 보이며 걷던 랄라가 돌아섰을 때 그녀의 얼굴은 신축성 좋은 티셔츠가 늘어난 것처럼 사방으로 팽창된 상태였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눈코입이 각 자리에서 만개한 것 같았다. 반 보 뒤에 걸으며 그녀의 반응을 쫓던 나인은 달뜬 랄라의 얼굴을 보고 이게 다 누군가는 쓸어버려야할 낙엽과 내 헛된 욕망의 대가 사이에서 대답할 생각을 그만두었다.


나인은 랄라의 첫인상을 기억하지 못했다. 랄라가 어느 날 따로 차를 마시자고 했을 때서야 나인은 그녀가 길쭉하고 체격이 좋은 여성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면 랄라는 나인과의 첫 대면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를 했다. 랄라는 그 장면을 회상할 때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꼭 단둘이 만난 것처럼 말했다. 실제 그녀는 열댓명씩 모인 자리에 줄곧 나인만 보였을 정도로 튀는 여성이었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도 있었다. 이 바닥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서로 간이나 보며 머릿 속으로 셈법을 따질 때 패를 다 까고 앉아 당신들은 뭘 가졌냐고 따져묻는 사람, 나인은 랄라에게 그렇게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나인은 랄라가 자신 보다 한참 늦게 그 모임에 참여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무슨 이야기 끝에 나인의 등장이 세번의 모임이 있은 뒤에 일이라고 랄라가 말해주었는데 그때도 나인은 랄라에게 승곤과 어떻게 알게된 사이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사실 나인은 그녀가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을 때에야 그녀의 동태를 깨닫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열세번의 모임 후 열 두개의 단체가 아니라 열 두명의 이사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씽’이 발족되고 두 사람이 어느 단체의 회의실 한 켠에서 업무를 시작했을 때에도 나인은 두 벽의 책장 가득 자료들이 뒤죽박죽 꽂혀있고 피켓이며 확성기 등의 집회물품들이 자리를 찾지 못해 바닥에 늘어져 있는 어느 시민사회단체의 회의실의 풍경만 기억에 남아있었다. 당시 사무국장을 맡기로 했던 지금의 센터장 K는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는 중이었고 승곤은 단체 운영비 마련을 위해 후원자를 찾아다니느라 자리를 자주 비웠다. 그래서 랄라와 단둘이 앉아 업무를 볼 때가 많았음에도 나인은 그 낯선 임시사무실에 꼭 홀로 앉아있었던 것처럼 생각되곤 했다. 그래서 나인은 한번씩 전 직장으로 피신해 가 있기도 했는데 그때의 느낌이 남아 그러고도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민자치센터에 찾아갈때면 꼭 고향집에 찾아온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에 반해 랄라는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나인이 목주변에 아이보리 퍼가 달린 갈색 무스탕을 입고 너저분한 사무실 한가운데로 홍해 가르듯 저벅저벅 들어오던 모습을 기억해내고야 말았다.


나인은 지금 이순간 랄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랄라는 고장난 브레이크 장치를 달고 위험천만한 드라이브를 감행하는 남성선배들에게 제동을 거는 사람이었다. 두어개 질문을 던지고 돌아오는 답을 듣고 별다른 말이 없다가 며칠이 지나 견적이 나온 듯 꼭 잊지 않고 가부 간의 답을 주는 정확하고 확실한 사람. 그런 랄라가 고장난 기계처럼 가다 말다 서다 말고 말하다 말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묻는 것이 선배들에게 하던 그것과 같지 않았다.

아리송한 단어들로 모면하는 것보다 자신의 선택을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실토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었지만 꼭 자신의 일처럼 겁이 나버린 랄라의 얼굴 앞에서 나인은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그날로 되돌아가 희미하게 지워진 랄라 첫 얼굴에 지금의 자신의 얼굴을 붙여넣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포자기의 심정과 더불어 이미 내 몫에서 감당불가능한 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해지도록 요행을 바라는 마음의 사이가 한끗 차이와도 같았다. 그래도 자신의 옆에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괜찮은 동료가 한 명쯤 있다는 것으로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인은 잠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려던 마음이 다시 한번 요행을 바라는 쪽으로 기우는 걸 느꼈다. 동시에 로또복권 한 장을 손에 쥔 것 처럼 배부른 얼굴이 되었다. 자신을 처음 보았을 그때 랄라의 얼굴처럼.


커버사진: UnsplashAndrew Wong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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