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행하는 편이거나 겁이 많거나

소설 <PART-마지막> #증후②

by 수빈조

“제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요”


랄라는 손에 쥔 전자담배를 입에 가져가다 말고 나인에게 또다시 불쑥 말을 꺼냈다. 나인이 벌써 겨울인거야? 라고 놀라듯 말하고 올해가 꼭 다간 것처럼 우리 아직 여기서 반년도 안된 거 아느냐고 묻는 와중에 랄라는 갑자기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결정에 저간의 사정도 듣지 않고 추궁하듯 물어본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인데, 랄라는 이 말을 하면서도 나인의 말은 듣는둥 마는둥 하고 겸연쩍은 얼굴로 툭 건네고 말았다.


“나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 알지. 뒤치닥거리나 하는 일 뭐 큰 일 있겠어~ 욕 잔뜩하고 해야지 뭐 어쩌겠어. 정권 바뀌면 이래나 저래나 다 싸잡아 욕먹을거 뭐”


그 순간 랄라는 나인의 될대로 되라 식의 답변에 흡연욕구마저 사라지고 있는 걸 느꼈다. 내가 하는 일이 시민들에게 인정받고 이곳에서 뼈 묻고 싶어요 이제 안정을 찾고 싶어요 라는 말을 하려다 꿀꺽 삼키고 나니 더 그랬다. 랄라는 손바닥 위에 오도카니 놓인 전자담배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손을 오므려 가디건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래로 축 늘어진 가디건 호주머니는 기댈 곳을 찾던 주먹쥔 손에 별로 의지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랬다. 나인은 선배들의 도전적인 과제에 함께 결행하는 편인 후배였다. 자신에 비하면 항상 그런 편이었다. 나인은 언제나 비장할 뿐이기만 한 남성선배들에게 의지만 가지고 일이 되냐고 비수 같은 말을 꽂아 놓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마다하지 않는 여자사람 후배였다. 랄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자고 선배들이 마련한 모임에서 나인을 처음 보았다. 자신의 경험과 통찰에 기대어 온전히 정리되지 않은 의견을 서슴없이 말하는 당찬 기운을 뿜는 사람으로 랄라는 내둥 그녀를 그렇게 기억했다. 타자로부터 조건 없는 친절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언제나 전투적이고 방어적 자세로 대화에 임하는 자신과 달리 그녀는 오가는 대화 속에 자신의 무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통찰에 기대어 되도록 어렵게 이야기하려는 이 바닥 헛똑똑이들의 말에 비하여 그녀의 말은 왜인지 더욱 설득력있게 들렸다. 그래서 당시 새로 단체를 만들자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도드라지는 사람이었다. 유일한 비운동권 출신 참여자라는 점에서 더 그랬다. 그 자리에는 운동권 계보 여기저기에 올라있는 선배들이 다수 모여 있었다. 모임에 두번째쯤 참여하고 난 뒤 어느 선배에게 이 모임에 대해 언급하니 그 선배는 NL에서는 경기동부연합과 인천연합에다가 PD계열로는 제파PD에 CA 브레인이었던 사람, 심지어 전향의 전향을 거듭한 과거 뉴라이트 계열 인사까지 그렇게 한자리에 모여있는 것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랄라는 잘 알지도 못하는 운동권 계파 나열에 어리둥절했지만 그게 뭐에요 먹는 거에요? 라는 말 대신 꼭 그것들을 다 아는 사람마냥 비릿하게 웃으며 종교대통합이네 기도나 해야겠다 라고 씁쓸하게 농을 던졌다.


그런 가운데 랄라는 어느 계열로도 분류되지 않는 나인이 반가웠다. 그녀는 시장이 바뀌고 소위 시장이 확대되며 입지가 좁아지던 이 시민사회운동영역, 넓게는 소셜섹터로 새롭게 진입한 시민그룹의 대표명사와도 같았다. 밝은 전망을 암시하는 부표 같은 청량한 기운을 풍겼다. 그럼에도 랄라는 그녀와 한동안 거리를 두며 지냈다. 큰 기대를 품고 발을 들인 사람일수록 된통 속은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이곳을 떠나갔고 남겨진 사람들도 그만큼 아팠다. 이곳은 새로운 세상을 욕망하고 시기에 따라 입신양명의 사적 욕망도 가득한 곳이었지만 본의를 알 수 없게 수면 아래 흙바닥으로 침잠해둔 것처럼 고요했고 언제든 혼탁하게 그 뿌연 색을 돌연 드러내는 곳이었다. 그것이 싫어 떠난 사람이 숱했고 상처입고 영영 회복불능의 상태로 남겨진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자연의 섭리처럼 결국 자기 소명과 있어야할 자리를 나 죽었소 하고 지켜낸 사람만이 결국 살아남는다 볼 수 있는 참으로 역설적인 곳이었다. 첫 번째 모임을 하고 두 번째 모임부터 참여하지 않을 줄 알았던 나인이 다섯번째 사전모임까지 참여하고 났을 때 랄라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단둘이 차를 마시자고 제안을 했다. 그때 나인이 운동권 사람들을 여기 사람들이라고 지칭하며, “왜 말끝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라느니, 무엇 무엇할 필요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를 왜 그렇게들 하느냐”고 빈정대듯 물었다. 랄라는 그날 이후 의식적으로 그 말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자신이 이상하게 나인에게만은 꽤 신경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한동안 누군가 말하는 중에 “그 지점에서 의견이 같다”라거나 “~할 필요가 있다” 등의 말을 쓸 때 나인이 떠올랐다. 자신의 오만했던 예측을 뒤엎고 나인이 시 산하의 주민자치센터 라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는 직장을 그만두고 여러 사람의 의지를 모아 새로 만든 단체인 ‘씽’의 사무국에 최종 합류하기로 결정했을 때 여성운동단체를 그만두고 이직을 준비하며 뭐든 선택이 자유롭던 자신에 비하면 쉽지 않았을 그녀의 결단에 랄라는 새삼 놀라지 않았다. 단지 가끔 그녀는 무엇을 동력을 삼아 이 곤궁한 영역에 남아있는 것인지 때때로 궁금했을 뿐이고 간혹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며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승욕망이 있다고 보기에 정치력에 소홀했고 입신의 보상을 계산하며 움직이는 편도 아닌데다가 앞 뒤 없이 일을 벌리는 선배들의 일을 수습하느라 꽤 손해보는 장사를 하는 편인 그녀를 자신처럼 안타까워하는 일도 점차 줄었다. 주어진 것보다 더 무겁게 책임을 지고 그저 일을 잘 해내고 싶은 것일 뿐인 어느 일 잘하는 언니와,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덤벼 들었다가 결국 피를 보고야 마는 미숙련자 사이에서 그녀를 저울질하던 아슬아슬한 2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그녀 주변을 스물거렸던 불안과 의심은 아스라이 지워져가는 중이었다. 무릇 시간이란 성장할 때 보다 성숙할 때 한층 더 실감나는 것이었다. 그건 자욱하게 눈 앞에 안개가 끼어 있는 것처럼 아픈 것도 덜 아프게, 선명하던 것도 좀 흐릿하게 보이게 하는, 공평정대한 노화 같은 것이고 어느 덧 랄라는 세월이라는 시간이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불쑥 끼어드는 감정에 정신을 빼놓는 경험과 사례가 줄어들면서는 뭐든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괜찮은건가 싶고 자타의 고통에 둔감해지며 한편 시간이란 것이 퍽 야속해지기도 했지만 랄라는 자주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이 갑작스런 오한은 퍽 별스러운 것이었다. 랄라는 이 낯선 반응이 반갑지 않았다. 랄라는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전날과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찬 바람 때문인지 갑작스런 그녀의 호기로움 때문인지 알 길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성실하게 시간이 쌓여 우연히 맞닥뜨릴 것으로 고대하던 낙관의 미래를 코 앞에서 도둑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망하지는 않을까. 상처입지 않을까. 시간만 허비하게 되지 않을까. 반짝이는 눈빛을 잃지 않을까. 영영 이곳에서의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여기저기 의문부호가 유리문의 찍힌 손자국처럼 심중에 지저분하게 찍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름이 온 몸을 덮어오는 게 또다시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희끄무레한 가운데 우뚝 선명한 것도 있었다. 그건 더이상 여기사람들이라고 타자화하지 않는 나의 동료를, 흔들리면서도 꿋꿋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던 한 명의 친구를 또다시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낙엽도 눈처럼 녹아서 사라지면 좋을텐데..”


정면을 응시하던 랄라의 고개가 낙하하는 낙엽의 속도에 맞춰 사선 아래로 떨궈졌다. 나인은 두 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어 균형을 잡고 벤치 끄트머리에 간당간당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다. 자켓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굽은 등을 하고서. 그 모습이 꼭 엄마의 반쯤 열린 폴더폰 같다고 랄라는 연상했다. 베이지색 자켓의 깃을 바짝 세우고 앉아있지만 그대로 드러난 그늘진 목이 썰렁해보였다. 그 때 랄라의 눈 앞으로 나인의 몸과 나란히 심해 바다 색깔의 텀블러 주변으로 붉은 단풍잎이 회오리 모양으로 날아오르는게 보였다.


커버사진: UnsplashTristan B.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

☞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 소설 <PART - two> 읽어보기

keyword
이전 01화될 대로 되라는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