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대로 되라는 식

소설<PART-마지막> #증후①

by 수빈조

“나인 도대체 왜. 아니 왜 한다고 한 거에요?”

“내가.. 내가 왜 그랬을까”


랄라는 맥이 쑥 빠졌다. 어깨에서부터 손바닥까지 두 팔이 수직으로 미끄러지듯 늘어져내렸다. 바람 빠진 풍선에서 마지막 숨이 싱겁게 빠져나오는 것처럼 머금고 있던 숨이 가슴 한구석을 들썩이며 휴 하고 빠져나왔다. 잠깐의 적막이 흐른 후 사실 아무런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은 그녀의 심상한 대답에 랄라는 속이 더욱 상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나인의 대답은 꼭 ‘그래야 하니까’라는 당위에 닿아있는 것처럼 더이상의 말을 이을 수 없게 했다.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기 보다 할 말은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말 대신 짧은 한숨이 흘러나온 것 같았다. 실팀장회의를 마치고 망설임 없이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와 그녀와 나란히 걷다가 뭐가 급한지 몸을 돌려 가던 길을 세우고 다짜고짜 물은 말이었다. 그녀의 선택을 뒤집을 작정을 한 것도 아니면서 랄라는 그렇게 질문하고 말았다. 정말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해서였는데 한 계단 아래서 올려다 본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상한 마음이 훅 나와버린 것이 미안해 다시 원래의 방향대로 돌아선 랄라의 몸이 한 계단 아래로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다시 조용히 가던 길로 걸었다. 1층 카페에서 각자의 텀블러에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담아들고 즐겨찾는 장소를 향해 막힘없이 걷는 것이다. 한 계절 내내 바깥 방향으로 열려있던 주차장 뒷문의 유리문이 어느새 가로로 닫혀있는 상태였다. 각각 힘의 방향으로 뒤틀린 두 개의 유리문 사이는 검지 손가락 끝부분이 끼일 정도로 살짝 벌어졌다. 두 개의 유리문 사이 틈새를 비집는 바람소리가 휘파람 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렸다. 랄라는 이 건물을 수선할 때 왜 이 유리문을 교체하지 않았는지 의아하고 기괴하다는 생각을 닫힌 상태의 유리문을 보면서 했다. 문은 어느 방향으로 열라는 안내사항이 없었다. 한자리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 것을 보며 랄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름이 뒷덜미에서 돋아나는 걸 느꼈다. 대충 걸쳐입은 가디건을 여미며 팔짱을 낀 랄라는 등에 가까운 어깨로 밀어서 문을 제끼듯 열었다. 문 안쪽에서 선 랄라는 그늘진 마당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힘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바깥 바람에 저항하며 열리는 문은 망가진 것처럼 덜컹거렸다. 압착해 두었던 병뚜껑을 열 때처럼 밀어내는 공기의 가운데가 부욱 찢어지듯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고 그보다 크게 유리문이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문틀 하단 힌지 부근에서 들렸다. 랄라는 유리문의 상태를 살펴보지 않은 채 눈살을 찌푸렸다. 매번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불편을 감내할 뿐 아무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랄라는 귓가를 찢는 두개의 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강한 바람에 유리문이 대중 없이 흔들리다 오가는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누군가 일부러 힌지를 강하게 조여놓은 것일 수 있다는 자족적 위안을 해버린다.


아직은 개운한 느낌을 주는 찬바람을 랄라는 깊이 들이마셨다. 계절은 서둘러 안녕을 고하고 있는 늦가을에 도달해있다. 출근하던 길 경비아저씨들이 빗자루로 쓸어담던 낙엽들은 어느새 파란색 반투명 비닐봉투에 담겨져 시멘트 마당 여기저기에 봉긋하게 솟아있었다. 몸으로 잡고 서 있는 문의 열린 틈으로 몸을 빼고 나온 나인이 가슴을 쭉 펴고 서있는 모습이 파란색 봉투를 보는 시선 옆으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랄라는 말없이 바람을 맞다가 나인의 등이 보이자 문에서 몸을 떼고 어깨를 웅크리며 겨드랑이에 껴있던 텀블러를 두 손으로 쥐어잡는다. 담겨진 액체의 온도가 텀블러 표면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랄라는 지금 그 점이 가장 아쉬워진다. 랄라는 통나무 반을 잘라놓은 모양으로 만든 시멘트 벤치 위에 앉을 생각은 않고 텀블러만 올려두고 가디건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냈다. 벤치에 앉아보는 상상만으로도 엉덩이가 시렸다.

문짱이 시장을 설득해 추경예산 중 일부를 단지 사업비로 추가 확보해두었다는 사실이 센터의 팀장들에게까지 알려진 건 내년도 사업비 실링 범위와 추가로 뽑을 직원의 수 그리고 고용형태를 두고 시와 센터가 실랑이 중이던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이 예산은 메르스로 피폐해진 서민경제와 관광산업 살리기란 명목으로 대규모 지방채를 발행해 지난해 8월 긴급하게 확보된 추가경정예산이었다. 회계년도를 절반을 넘긴 시점까지도 집행률이 저조하자 시 재정국에서 실국별로 추가 사용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예산은 일감이었고 5개월 내로 마쳐야할 추가 일감에 눈독 들이는 부서는 당연히 없었을테니 어쩌다 적극적으로 손을 든 모양이 된 문짱이 그러저러하게 떠안게 된 예산은 총 30억이었다. 대단위 비용이 들어가는 건축, 건설 등의 예산은 시의 기반시설국에서 직접 챙기는 일이었고 개소 3개월이 넘어가고 있는 신생 조직인 창의센터에서는 언감생심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사업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센터가 내년도 사업예산으로 시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에 따르면 직원 인건비 제외한 사업운영비가 채 30억이 되지 않았다. 1년으로 환산해 추산만 해 보았을뿐인 사업비를 단 4개월 안에, 그것도 큰 비용이 숭덩숭덩 잘도 들어가는 공사비가 아닌 사업비로 모두 집행해야 하는 꽤 도전적 과제를 문짱이 지르고 나선 것이었다. 역시 이에 영민하고 빠르게 반응한 그룹은 시 공무원들이었다. 추경예산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는데다가 촉박한 집행 일정 등으로 사고처리가 빤해 보이자 눈치 빠른 시 공무원들이 이 프로젝트의 행정절차를 자신들이 직접 밟기 어렵다고 발을 뺀 것이었다. 센터로 이 사실이 알려진 건 추경예산 집행을 위하여 문짱이 사전에 작업해둔 용역 업체와 계약을 실행해야할 때에서야 였다. 문짱이 결국 배제하고 있던 센터장 K를 불러 프로젝트의 공모부터 계약, 준공처리까지의 행정 절차를 센터에서 담당하라고 내려보낸 일이 초가을 실팀장회의 중에 센터장 K가 알려온 내용이었다. 추경예산의 기획과 관련하여 국장 직속의 자문단이 꾸려져 논의가 한창이라는 것도 그 자리에서 알려진 내용이었다. 랄라가 보기에 센터장 K도 단단히 속이 틀린 모양이었다. 연말에 예정된 행사에 이어 센터장 K는 총괄관리자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두번째 문짱에게 패싱을 당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프로젝트의 구조상 중요한 의사결정과 매니징은 자문단에서 하고 절차상 필요한 서류에 사인은 센터장 K가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떤 권한도 없이 책임만은 지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럴싸한 일은 죄다 두고 뒤치닥거리나 하는 허드렛일만 잔뜩 내려보낸 꼴이었다. 랄라는 이쯤되니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것보다 참 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랄라는 문짱이 센터장 K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작가와 용역사 대표로 TF를 꾸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이 자문단에 참여 중인 청년혁신플랫폼 센터장 경원으로부터 들어 알게 된 것이었다. 경원은 단지 내 입주해 있는 시 산하 청년활동지원기관 기관장이었고 하필 그녀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는 것만으로 센터장 K의 신경을 꽤나 긁는 일이었는데, 그건 그녀가 센터장 K와 문짱의 갈등이 막 비상하고 있을 때 차기 창의센터장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문의 진위에 대해 모르는 채 했지만 이 구설만으로도 적어도 한 사람, 센터장 K에게는 확실한 메시지가 되었다. 산하 기관장 하나쯤 국장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갈릴 수 있는 자리라는 메시지. 센터장 K는 괜시리 그녀의 1층 집무실에 들려 이것 저것 의견을 구하면서 눈치를 보았다. 그 와중에 그녀가 입주해있는 시 산하 중간지원기관장들을 불러모아 정기적 모임을 제안하고 A동 입주단체 중 입김이 쎈 사람들을 모아 입주기관대표자회의 같은 것을 구성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 모양이었다. 한동안 센터장 K는 단지 내 빅마우스 역할을 할 인물들을 만나고 다녔고, 랄라는 그의 이런 행보가 과연 살고자 하는 것인지 부서지고자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지만 한결같이 덤덤한 척 했다. 이 프로젝트 자문단에는 경원 말고도 두 명의 전문위원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씽’의 이사인 H대학교 경제학과의 최식 교수와 예술가 M이었다. 추경예산은 경기부양 차원으로 편성된 예산인 탓에 건축비나 공사비 등의 용도로 집행할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문짱은 당장 시각적 효과가 드러나는 하드웨어를 포함한 사업비로 사용해보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은 그 일을 해야 하는 명분에 있어서, 그리고 절차적으로, 하물며 그 목적하는 바에 있어서도 단단히 삐끄러진 모양을 띄고 있었다.


센터장 K는 3명의 실장들과 논의 끝에 결국 비정규의 단기인력을 뽑아 이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별정직으로 구성된 TF에서 행정절차를 밟아 진행하는 줄로 알았던 일이 문짱의 제동으로 다시금 실팀장회의 테이블에 뜨거운 감자로 올라온 것이었다. 문짱은 비정규 인력에게 믿고 맡길만 하지 않은 과업이라는 것과 더불어 입주기관들의 민원을 외부인력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센터의 결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입주단체들은 예산 집행에 급급한 보도블록 예산에다가 입주기관들의 수요도 파악하지 않고 사용되는 예산 남용이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입주그룹들이 용역에 참여할 수 있는 협력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문짱은 행정처리만은 책임지고 처리하기로 한 센터에서 단지 내 컨센서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투리를 잡으며 이 일을 담당할 팀장급 이상의 센터 직원을 TF에 배치하라고 노발대발 댔다. 랄라는 컨센서스 라는 말이 이토록 사변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고 그날 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컨센서스라니 누가 할 소리를 하느냐고 소리내 말을 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니 이 일은 누구에게도 할당되지 못하고 매주 회의 안건으로 올라왔다. 센터장 K도 선뜻 누구에게 그 일을 맡으라고 떠넘기지 못했다. 랄라는 센터장 K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누구에게도 일을 떠넘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충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안건이 회의석상에 오를 때마다 경쟁하듯 딴청을 피우면서 몇 주째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는 것을 두고 그 자리 있는 모두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참 억울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인이 그 일을 자진하고 나선 것이었다.


커버사진: UnsplashAshraf Ali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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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PART - two>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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