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PART-마지막> #증후 ⑤
나인이 다시 방문했을 때 그 방은 꽤 사무실 같은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두 벽 면의 삼분의 이를 채우며 난 긴 창들 덕에 채광이 좋은 방이었다. 15평 남짓의 방에는 창측으로 붙은 테이블 두 개가 긴 면을 맞대고 놓였다. 테이블의 세 면으로 사무용 의자 다섯개가 테이블 아래 가지런히 정돈된 상태였다. 불과 7개월 전만해도 오랜 시간 부단히 습기를 머금고 눅눅해진 카펫 위로 버려진 가구며 집기 따위가 지진이라도 난 듯 어지럽게 쓰러져있던 방이었다. 바닥의 카펫을 뗀 자리에 대리석 마블 모양의 데코타일이 깔리고 벽에 하얀 페인트를 덧발라 수선을 한 이 방은 여지껏 주인을 찾지 못했다. 대신 문짱이 야심차게 밀어붙인 프로젝트의 임시사무실로 한 달반째 사용중이었다. 이 임시사무실은 작업에 참여중인 예술가들과 설치·조형 작가들의 작품을 형태적으로 구현할 시공용역사 직원들이 드나들도록 되어있었다. TF에 참여한 후로 나인은 꽤 자주 비즈니스 파트너들이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망상과 불안에 종종 시달렸다. 나인은 이 사무실에 두번째 방문중이었고 두번째만에 실제 가본 적 없는 이동식 중개업소 ‘떳다방’을 드디어 떠올린 건 이 망상이 순간 확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방문을 열었을 때 한 눈에 보인 서류뭉치 몇 장만 덜렁 놓인 이 주인 없는 접이식 듀라테이블이 문제였다. 하여간 나인은 급히 떠난 주인보다 한 발 늦게 들이닥친 손님이 된 것처럼 황망한 마음까지 들었는데 그건 첫 방문의 그것과는 사뭇 달리진 이 방의 분위기 때문인 것만은 확실해보였다. 나인이 처음 이 방에 온 건 프로젝트의 총감독을 맡고 있는 예술가M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특이하게도 이 방은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들어설 수 있는 방 안에 방이 있는 구조였다. 우편취급소를 지나 좌측으로 코너를 돌면 나오는 첫번째 문이 이 방의 가장 바깥의 문이다. 굳게 닫힌 문과 벽이 만드는 묵직한 매스의 면이 중정으로 난 창의 열린 면과 마주하며 경쟁하듯 소실점 끝으로 이어진 복도에 서면 나인은 엄혹한 시절을 잘 알지 못함에도 꼭 그 시절 고등학교 복도 끝에 서있는 기분이 되었다. 짙은 고동색 나무문과 같은 색의 바닥몰딩을 떼고 진그레이 인테리어 필름으로 색이 교체된 지금의 풍경은 그럭저럭 사무공간의 느낌이 났지만 이 구조적 풍경 앞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게 쫄리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문 앞에 명패가 붙어있지 않았다. 공고 20여일만에 제안서를 제출해 심사를 받고, 계약자 선정 후 사업수행기간은 총 60일 그 용역비가 자그마치 30억에 달하는, 올해 종료 직전 시장에 나온 이 용역사업은 누가봐도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짜고 치는 판이란 걸 눈치챈 업체들이 응찰에 나서지 않았다. 용역명 <창의테크밸리 창조력 증진을 위한 야외마당 활성화 프로젝트>, 이 아리송한 과업내용도 한 몫 했다. 한 번의 유찰이 있었고 사업기간은 50일까지 줄어들었다. 결국 두번째 입찰만에 문화기획사와 건축시공업체가 조인한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컨소에 참여한 문화기획사는 예술가 M과 오랜 인연이 있는 업체로 국내외 예술가들을 기획그룹으로 배치한 것이 좋은 점수를 얻었다. 예술가 M이 공고문이 나오기 이전부터 공들여 섭외한 작가들이었다. 이들 업체는 창의테크밸리 야외마당에 건축물과 어우러지도록 파빌리온 등 중소규모의 가설건축물 17개를 축조하겠다고 제안했다. 일상적 사용불능의 대규모 전시회장과 달리 평상시에는 입주그룹들의 휴게, 여가, 업무 등의 용도로 쓰고 비상시에는 설치된 가설건축물 전체를 활용해 대규모 행사가 가능하도록 가변적 가설건축물을 야외마당에 세우겠다는 제안이었다. 가설건축물은 건축물에 해당되지 않아 공사비로 사용이 불가한 추경예산으로도 사용이 가능했다. 지난 3개월 동안 문짱과 그의 직속 자문기구에서 구상한 내용이란 시스템의 헛점을 살펴 기어코 예산을 쓸 수 있는 꼼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선협상대상자에서 최종낙찰자가 되는 과정은 호락하지 않았다.
예산사용계획에 대하여 항목별 타당성과 책정금액의 합리성을 따지는 계약심사과정에서 허술하고 기형적인 프로젝트의 제안서류들은 손으로 들고 터는 것처럼 그야말로 탈탈 떨리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내 파투라도 나기를 바랬던 처럼 공무원 사회가 온 힘 다해 훼방을 놓는 것 같았다. 계약심사과의 해당 용역 계약담당자는 이 용역이 사실상 공사에 가깝다고 보고 컨소시엄에 제작물의 설계도면과 공사진행 순서를 적는 시방서, 품셈(공사에 드는 자재 등 공량을 계산하는 것) 등 공사용역에 준하는 서류를 요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나인은 이 비효율적 시스템의 효용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편으로는 그들이 최선의 결과물을 얻기 위한 노력과 무관하게 문제의 소지만 없도록 근거서류를 챙기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다시 한번 깨닫고 있었다. 그 덕에 나인이 이 문패 없는 방을 처음 방문 했을 때까지만해도 최종낙찰자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날 나인은 진행되는 일의 경과를 공유하기 위해 예술가 M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작가들이 쓱쓱 그린 스케치와 서류제출을 위해 만들어진 설계도면과 시방서를 두루 살피며 시공업체는 자재 구입에 나선 뒤였다. 예술가 M이 이 프로젝트의 랜드마크와도 같은 파빌리온의 스케치에 마지막 에너지를 쏟고 있는 동안 나인은 그가 그것의 설치장소로 점찍은 테니스장의 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업 공식 종료 38일을 남겨놓은 때였다. 나인은 차라리 불용처리 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 최종 계약 승인이 나지 않아 지금까지 진행된 일이 무산될 때의 경제적 손실이 얼마일지 추정해보며 도대체 무엇이 더 나은 쪽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진그레이색 필름지가 부착된 문 앞에 서 있었다. 불투명 유리창이 손잡이 위로 길게 달린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나인은 수수께끼처럼 또 다시 세 개의 문 앞에 섰다. 나인은 공간 내부의 시점에 서면 가끔 이 건물은 무슨 용도로 어떻게 쓰였을지를 상상하곤 했다. 스테레오타입이 아니어서 당혹스러워질 때 드는 생각이었다.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는 E동을 둘러볼 때 특히 그랬는데, E동은 실험에 쓰는 화학약품을 보관하던 시약창고로 쓰였던 곳으로 전시회장으로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었다. 창이 없이 어두운 방들을 지날 때마다 나인은 간격 좁은 빈 선반들을 보며 약품 냄새가 나는 듯 코 끝이 시린 기분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방은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 방의 천장은 삭을 대로 삭은 나무들이 곧 부서질듯 아슬아슬하게 설기진 박공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나인이 이 방에 들어서 갑자기 밝아진 눈이 동그레져 혹 삭은 나무 자재가 머리 위로 떨어질까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머리를 막아설 정도로 놀라고 말았는데, 지붕 사이 하늘이 훤히 보일 정도로 뻥뚫린 천장때문이었다. 나인은 뚫린 지붕으로 보이는 유독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 라는 상상을, 영영 가닿을 수 없을만큼 높은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했다. 전시장으로 사용될 E동은 가장 안쪽의 방 선반만 살리고 뚫린 천장은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판넬로 막아 보존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방의 방 문 앞에 서서는 이토록 비효율적인 공간이 있나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세 개의 문 앞에서 나인은 두번째 시도만에야 퍼플에 가까운 파란색으로 머리염색을 한 예술가 M을 볼 수 있었다. 오른편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비로소 마주한 예술가 M은 방 한가운데 캠핑의자와 테이블을 펼쳐 놓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나인은 그를 두번째 보는 것이었고 그 사이 그는 분홍색과 회색이 절묘하게 섞인 것에서 파란색으로 머리색을 바꾸고 나타났다. 예술가 M은 나인이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어서오라고 인사를 하고는 다시 머그잔 위 드리퍼에 김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스틸주전자에 담긴 물을 신중하게 부었다. 창측 벽 콘센트에 이어져 바닥에 놓인 전기포트에서 부글부글 끊는 소리가 났다. 캠핑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디그라인더 주변으로 커피가루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발갛게 달아오른 전기스토브가 테이블 앞에서 삐그덕 대며 시원찮게 회전운동을 했다. 나인은 그를 처음보고 영화 <백투더퓨처>에 나오는 괴짜 박사님을 떠올렸었다. 육십 평생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만 다닌 습관이 인이 박힌 것 같은 얼굴, 그는 나인에게 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인은 두번째 만난 그가 꽤 범상한 인물로 보였는데, 그건 텅 빈 사무실 한가운데 캠핑의자에 앉은 파란머리 아저씨가 커피를 내리고 있는 풍경이 스테레오타입처럼 진부한 장면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인은 이날의 대화가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갈 수 없다는 걸 방문을 연 순간부터 직감했다. 자기 자리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가 놓아둔 캠핑의자에 앉아 나인은 그가 내린 커피를 군말 없이 마셨다. 그리고 나인이 원두가 다른 커피 세 잔을 내려마시는 동안 예술가 M은 총감독으로써 구상중인 이 프로젝트에 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라운드와 플레이, 크리에이터 등의 단어가 여러 차례 나왔고 놀이와 업무의 경계를 허무는, 용도에 따라 공간의 해체와 재조합이 가능한, 대충 이런 이야기들을 나인은 커피에 취해 흘려들었다.
그러나 나인은 두번째 방문만에 뒤바뀐 전경에 당혹스러운 것인지 섭섭한 것이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이 나른한 풍경으로부터 뒷걸음질치듯 그 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처음 이 곳에 들어섰을 때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열어보았던 정면의 문을 다시 밀어 열었다. 이 방들의 가장 바깥에는 어느 덧 <혁신가들의 놀이터 프로젝트 TF> 라는 팻말이 붙었다.
커버사진: Unsplash의 Shefali Lincoln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