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PART-마지막>#증후 ⑥
예상대로 이 방의 분위기는 내내 냉랭했다. 이 방은 처음 봤을 때랑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다. 작가들이 시공업체에 맡길 수 없는 작업을 하도록 별도로 마련된 작업공간이었다. 야외에서 작업하는 시공업체 직원들이 한파 속에서 작업하느라 얼은 몸을 녹이고 쉬는 휴게장소로도 쓰인다고 했다. 이 방은 예술가 M을 만났던 옆 방보다 4배는 커보였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게 생긴 방. 긴 한 면으로 창이 빼곡히 나있었지만 옆 방에 비해 채광이 좋지 않았다. 누가 갖다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2인용 가죽소파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덩그러니 문에서 가까운 쪽으로 그러나 공간 전체로보면 오른쪽으로 치우쳐 놓여있었다. 누군가 작업을 했던 듯 듀라테이블 1개가 가족소파 앞에 바짝 붙어 펼쳐져있다. 이 방에 할당된 대형 등유온풍기 2대 중 한 대가 펼쳐진 테이블 앞에 조금 떨어져있다.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머지 한대는 문 옆 벽에 처음 그대로 인 것처럼 붙어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묵직한 물체들이 검은색 비닐에 덮여 쭉 늘어 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은 텅 빈 방처럼 보인다.
나인은 가죽소파 옆에 놓여진 스툴을 가져와 문이 닫히지 않게 고정해두곤 벽에 겹겹이 접혀 세워진 듀라테이블 여러개 중 가장 바깥의 것을 끌어다 다리를 펼쳐 세웠다. 어디에 두어야 좋을지 텅 빈 공간을 휙 둘러보며 고민하다 살짝 끌어 두고는 펼쳐져있던 테이블 하나도 끌어다 붙이고 가죽소파에 마주해있던 등유온풍기도 끌어다 테이블을 바라보게 두었다. 그리고 이 역시 겹겹이 세워진 접이식 의자를 펼쳐 자리를 만들었다. 다섯개째의 접이식 의자를 펼치다 말고 몇 개의 자리가 필요한지 생각하다가 다시 두 개를 더 펼쳤다. 사업기한 35일을 남겨놓고 최종낙찰자가 선정되며 드디어 갑을관계가 성립된 각 이해관계자들이 처음 모이는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일종의 상견례 같은 성격을 가졌지만 인사치레만 해도 괜찮은 자리는 못될 것이었다. 컨소시엄의 두 업체에서 총괄 PM과 직원 1인이 참석하고, 국장 직속 TF에서는 총감독 예술가 M과 자문위원 경원, 센터에서는 센터장 K와 나인의 직속 상사인 실장 J 그리고 나인이 참석하기로 되어있었다. 센터의 공식 출근시간이 오전 10시였으나 다음 일정을 핑계로 센터장 K는 9시 30분 미팅을 제안했다. 어쩐지 벌주는 것 같은 이 약속시간 보다 10분이나 일찍 도착한 나인은 텅 빈 공간에 블럭을 쌓는 것처럼 조용히 회의자리를 세팅중이다. 마지막 피스를 놓는 기분으로 나인은 온풍기를 켰다. 가슴 높이 만큼 올라오는 난방기 상단의 버튼이 딸깍 소리를 내며 눌렸다. 따닥소리와 함께 화르륵 난방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몸으로 느끼며 나인은 버릇처럼 이 난방기의 사용비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임시사무실이 열리고 가장 먼저 세팅된 이 난방기는 처음에는 전기식이었다고 한다. 전기식 온풍기 사용으로 건물 전체의 전기공급이 불안정해지자 관리사무실로부터 주의를 받고 불행하게도 등유로 재렌탈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인은 전해들었다. 이런 일은 여름에도 왕왕 있었고 한전의 승압승인과 분배기 교체, 그리고 개개인의 노력으로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기료야 센터 운영경비로 처리할수도 있었겠지만 기름은 문제가 좀 달랐다. 그건 이상했지만 그랬다. 이미 예상치 못한 테니스장 철거비용을 두고도 한참 실랑이가 있었다. 센터 사업예산안에 철거비용 혹은 그에 준해 사용가능한 항목이 있을리 만무했다. 공공자산을 사비를 털어 없애 버릴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컨소시엄은 계약 내용을 들이대며 조형물을 제작해 설치하는 것까지만 하겠다고 엄포를 두었다. 작업일정이 줄며 시공업자들이 웃돈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결국 문짱까지 나서 컨소시엄으로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과연 이것이 원만한 합의에 이른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계약서에 사인한 날 이전의 모든 비용은 훗날 받을 용역비를 상정하며 땡겨쓰는 것이었다. 연료량 눈금의 세 칸 중 마지막 한 칸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자신만 빼고 다들 배짱이 두둑히 좋았다. 나인은 난방기 상단 송풍팬 옆에 폼텍으로 붙여진 단골주유소 연락처와 달아두어야할 외상장부의 명칭이 적힌 안내문을 읽은 후 어딘가 여분의 등유가 있는지 사무실 구석구석을 눈으로 휙 둘러보았다. 없으면 누구라도 시켜두어야 다음 사람이 추위에 떨지 않았다. 오래된 시설을 외관만 수선해 사용하는 탓에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나인은 이 점이 그리 싫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면 자연히 공기가 따뜻해진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나인은 방의 방 구조에서 열어보지 않은 마지막 한 공간이 분명 창고일 거라 짐작했다. 그곳에도 여분의 등유통이 없으면 정말이지 새기름을 시켜야겠구나 했다. 그렇게 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낯선 얼굴로 한 사람이 가장 바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인이 멈칫 서서 고개를 꾸벅하고 그의 눈치를 살피자 그는 피로한 얼굴로 말도 없이 나인이 깔아둔 자리들 중 문 쪽에서 가까운 눈 앞에 보이는 의자에 성의없게 앉더니 매고온 크로스 가방을 목 위로 빼 책상 위에 두고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이러저기 뒤지기 시작했다. 나인은 단번에 그가 총괄 PM을 맡고 있는 김철진 이라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나인은 예술가 M을 만난 뒤 곧바로 그에게 요청 받은대로 이철진에게 전화를 걸어 계약심사에서 최종 승인된 견적 내역 공유와 예산 사용 계획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요청했다. 그리고, 실제 납품일을 연기한다 하더라도 계약서상 기한에 맞춰 제출해야할 정산서류를 만드는 작업을 돕겠다고 제안했다. 어차피 자신은 최종문서를 검수를 해야 하는 입장이고 시간이 얼마 없으니 지금부터 서류를 함께 챙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30억에 달하는 사업비의 사용증빙을 일일이 해야 했고 납품해야할 제작품이 크게 17가지에 가설건축물마다 들어갈 소프트웨어 품목이 자질구레하게 많아 챙길 서류가 제법 되어 보였다. 공기관의 비용을 집행할 때는 예산항목별에 맞춰 활용기준에 따라 총비용에서 인건비, 일반관리비, 이윤 등의 비중은 일정 비율을 넘을 수 없었다. 검수과정에서 체크해야할 내용이 많았다. 빡빡한 집행기준과 절차에 따라야 하는 까닭에 이 체계가 낯선 사람들은 기준과 절차에 벗어날까 전전긍긍했지만 이 체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눈 먼 돈 마냥 허점을 뚫어 편법적으로 예산을 사용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 대비해 제안한 것이었는데 김철진은 후자의 경우를 의심받은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첫 통화부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잘못해서 돈을 토해내던 말던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일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괜한 오지랖이었구나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정도로 말해도 되는 문제라고 나인은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 정도 할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했던 것과 같이. 나인은 상대가 자신으로부터 혐의를 받고 있다고 단정했다면 기분이 영 언짢을 수 있겠다고 이해하면서도 각자의 역할 정도로 숨겨진 저의는 모른 척 용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을까 구질구질하게 가정해보며 무안함을 지워보려 애썼다. 서류상의 갑을관계, 언제든 힘으로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 매번 저의를 의심받는 것은 억울했지만 상대가 온 몸에 바짝 바늘을 세우고 있는 것쯤 비즈니스의 역학관계에서 각자의 방어기제라 용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처한 위치와 상황과 그 개인과 파트너의 특징과 업무의 형태와 처리방식 따위로 꼬여버린 속사정이야 그렇다치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치레도 못할 정도로 그가 유독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현재 일의 상황이 그런 것인지 나인은 추위라는 불가항력에 무력한 대응을 고민하던 와중에 김철진과 대면하고 또다시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인은 보통 그와 대화를 해야 했다.
커버사진: Unsplash의 Yener Ozturk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