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PART-마지막> #증후 ⑦
센터장 K와 실장 J가 가장 바깥 문을 열며 정면의 열린 문을 통해 함께 방 안으로 들어 왔다. 센터장 K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나인에게 곁눈짓을 하고 앉아있는 김철진에게 일찍오셨네요 라고 인사를 건냈다. 김철진이 구부정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네 라고 간단히 화답했다. 나인은 접의식 의자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냉랭한 플라스틱 의자의 냉기가 청바지 안 내복을 뚫고 올라왔다.
“계약심사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네요. 고생많으셨어요. 실제 최종납품은 1월말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그동안 작업을 하고 계셨다고 들어서”
서류상 준공일은 12월 31일이었다. 막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음에도 센터장 K가 조급한 속내를 드러냈다. 나인은 황급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수첩을 열었다. 사무실에 들러 가방을 부려놓고 필기도구만 챙겨온 덕에 짐은 별로 없었고 손은 아직 찼다. 온풍기 가장 가까이 앉은 나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온풍기 쪽에 대고 비볐다.
“제작일수를 줄일 만큼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던 건 아니구요. 계약이 어찌될지 몰라서.. 작가들의 스케치를 보고 시공업자들이 바로 작업할 수 있는게 아니어서 중간에서 소통하는 설계매니저들하고 작가들하고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아 아직 그럼 한 개도 작업이 진행된 게 없나요?”
“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센터장 K는 말이 없어졌다. 그 때 경원이 가장 바깥의 문을 열고 정면의 열린 문으로 들어오며 늦었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경원은 약속시간 보다 5분이 지나 이 방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경원에게 가닿고 저마다 가볍게 인사를 하는 동안 김철진은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경원이 웃는 낯으로 부산하게 자리를 정돈하며 나인에게 눈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온풍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것처럼 앉았다.
“아직 총감독님이 오시지 않으셨는데, 저희까리 할 수 있는 논의부터 시작하고 있을까요?
“그러시죠”
센터장 K는 예술가 M의 회의 참석에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언제쯤 당도하는지 확인해보라는 요청도 없었다. 경원이 센터장 K의 뜻대로 회의를 진행시켜도 된다고 용인해주었다. 자신이 업무역량이 아니라 맷집과 눈치만 잔뜩 늘고 있다고 나인이 자괴하고 있을 동안 센터장 K가 혼잣말을 시작했다.
“알고 계시다시피 여기에서 이 일의 경위를 제일 모르는 그룹이 아마 저희 센터일 겁니다. 문서상 저희가 진행하고 있는 절차이니 책임을 다 하겠다는 말씀드리면 좋겠지만 그런 번드르르한 말로 책임을 다 할 수 없는 지경이고. 제 뜻과 어긋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아실테고요. 센터도 제 코가 석자이다 보니 그냥 앞뒤 안가리고 툭 까놓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인은 회의 제목도 안건도 정확히 알지 모르는 채 였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덮어놓고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이 회의가 프로젝트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회의장소 앞에 당도해서야 프로젝트의 풀 명칭을 인지했고 이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다함께 각자의 책임을 내던지고 서로에게 인간적 결례까지 범하고 있는 연유도 동시에 알게 되는 것이다. 최악을 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물게 될 책임에 대하여 최대한 덜어내고 있는 과정이었다.
“저희의 요청사항 전달드리려고 이 자리 제안 드린 것이고요. 기획부터 결과물까지 일의 진행에 관한 모든 전권이 국장님과 TF 총감독님, 여기 와 계신 청년센터장님께 있으니 TF의 컨펌을 받아 일을 진행해주시되 준공여기 나인이 서류를 챙길터이니 요청하는 서류는 12월 29일까지 차질없이 꼼꼼하게 제출해주시고요. 1월 29일 오전 저와 TF 최식 교수님 등이 납품물품 감수를 진행할텐데 이 일정에 차질 없이 일 진행 요청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지요?”
“일정도 워낙 빠듯해졌고 시공업체에서 본래 견적보다 1.5배씩 금액을 올려 부르고 있어서요. 제작물 갯수를 줄이던지 해야..”
“그건 변경계획을 시에 득해야 하는 일인데 지금으로써는 불가능하구요. 그리고 저희가 잔금을 미리 다 치르고 진행하는 거잖아요. 저희에게 몹시 불리한 상황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은 감안 안해주시나요? 내부 사정은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시커멓기도 하고 혹은 누렇기도 한 김철진의 얼굴은 말을 할 때도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시종일관 표정이 없었다. 일이 본격화되자 시공업자들이 짧아진 작업 기간을 이유로 본래 견적보다 높은 비용을 요구하는 모양이었다. 행정절차에 따른 결정은 지연되고 상황은 계속 바뀌었지만 문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았고 이 갑을관계의 족쇄는 갑을 모두가 패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나인은 누구와 누구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갈등인지 알지 못한 채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는 꼴로 앉아있다. 나인은 새삼 랄라가 확신했던 단정적 해석과 닫힌 결말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냥 랄라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업비는 센터로 배정되어 집행될 예정이나 센터장 K에게 실질적 권한이 없는 이상한 구조, 비상시국의 경기부양 차원으로 편성된 예산을 신임 시장의 전략사업에 어거지로 끌어온 대규모 추가사업비, 공사비로 사용이 불가한 예산임에도 가시적 성과를 위해 하드웨어적 결과물을 고집중인 총괄 시 국장, 원하는 바의 달성을 위하여 왜곡과 꼼수로 설계된 프로세스, 가설건축물과 지붕 없고 바퀴 달린 이동형 조형물 등 본디 쓸모와 무관한 기형적 결과물, 30억의 예산 총 17개의 조형물와 50여개의 세부 내부 구성품으로 잘게 쪼개져 행정처리의 일감은 무궁히 많은데 물리적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의 조건. 일하는 방식도 철학도 언어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단기에 협업 해야 하는 일인데 심지어 사회성들도 부족하여 괜찮은 결과를 낼지 의문이라던 그녀의 속단이 빠르게 드러나고 있었다.
센터 직원들과 대화를 하고 나면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고 그 센터의 또다른 직원인 나인에게 토로하던 예술가 M은 결국 회의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간이 넓어서인지 온풍기 한 대만으로 방 안의 공기는 쉬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머리가 지끈하게 공기를 무겁게 내리까는 등유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그제야 나인은 창고에 여분의 등유가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곧 삑삑 하고 연료를 보충하라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불안한 기분에 나인은 회의가 진행중이었음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긴장감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세상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터벅터벅 걸어 닫힌 가장 바깥 문을 바라보고 오른편에 굳게 닫힌 문 앞으로 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고 있단 걸 아랑곳없이 열어보지 않은 마지막 미지의 문을 열었을 때 나인은 미로 같은 이 임시사무실의 그 어떤 공간을 보았을 때보다 가장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건 단지 짙은 회색의 시멘트벽. 당연하게 짐작했던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왜지?’ 나인은 머리 속에 의문부호가 크게 박혔다.
커버사진: Unsplash의 Michael Dziedzic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3부(three)에 속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