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 대자연 ⑫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거야? 당장 눈 앞에 소소한 대비는 하지도 않으면서”
톤은 낮게 깔리고 입은 웃고 있었지만 분명 다그치고 있었다. 수혁이 막 말을 마쳤을 때 그의 왼쪽 팔목에 매달린 3단 우산이 좌우로 나부꼈다.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말끔하게 접힌 3단 우산은 좀전까지 수인의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수혁의 손아래서 작게 하늘거리던 접이식 우산은 그러므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상태였다. 벌써 그렇게 말끔히 접어둔거니. 좀 마른 다음에 접어두지. 수인이 떨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을 때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표정 없는 수혁의 얼굴이 들어와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멀뚱히 선 수혁의 얼굴. 수인은 그의 얼굴을 외면하는 것처럼 눈길을 피해 곧 다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눅눅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이었다. 대낮임에도 초저녁처럼 남색으로 물들어가던 중의 하늘 빛이었다.
그러니까 좀전까지 수인은 대책 없이 나와 걷던 중 들이닥친 비를 피하겠다고 모처럼 휴일을 맞아 쉬고 있던 수혁에게 우산심부름을 시키고는 고향의 부모님댁에 내려가 농사나 짓고 살끄나 하고 지나가는 말로 묻는 그의 말에 불안정 노동여건에 시달리느라 전전긍긍하는 프리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만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년 일감 줄어 걱정인데 왠 시덥지 않은 소리냐까지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거기에 더해 이제와 둘이 거기 내려가 해보지도 않은 농사일로 입에 풀칠이나 하겠느냐느니 언니와 나 달랑 둘 밖에 없는 우리 엄마는 아프면 누가 병간호를 하냐는 등의 지금보다 더욱 열악해진 여건 속에 살지 모르는 끔찍한 날들을 머릿 속에 찬찬히 떠올리며 한참 장광설을 늘어놓고 말았다. 지금도 살얼음을 걷듯 아등바등 조바심내며 사는데 노년이 되어서도 그래야 한다니. 수인은 몸서리가 나게 싫었다. 수혁의 말마따나 일어날지 알수도 없는, 그러나 지금과 같다면 도래할 것이 자명해보이는 그 먼 미래가. 몸까지 부르르 떨며 손사래까지 치는 모습을 보더니 말을 잘못 꺼냈다 생각했는지 수혁이 말을 끊고 섰을 때 수인은 불현듯 정신이 든 것처럼 잔뜩 찌푸러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정하게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자 했던 수혁이 부슬부슬 내리는 빗 속에 서 있었다. 이날 오후 비소식을 알리는 일기예보에도 대비하지 못한 누군가의 머리 위에 투명 비닐 우산 하나를 받쳐들고서.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줄기 하나를 수인은 오른 눈꺼풀 위에서 오른 손등으로 끊어냈다. 한쪽 눈이 자연스럽게 찌푸러졌다. 손등에 남은 물기는 얇은 등산용 집업 티셔츠의 오른 허리춤쯤에서 대충 슥 닦아냈다. 찡그려진 눈꺼풀 위로 작은 경련이 일었다. 감은 눈 안쪽이 서서히 젖어들고 코 끝에선 짙은 보이차향이 묻어났다. 수인은 관성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던 발걸음을 멈춰 서서 그날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후두두둑. 작은 새 한마리가 나뭇가지를 내딛고 날아오르는듯 아무리 둘러보아도 출처를 알 수 없이 허공을 맴도는 다급하고 불규칙적인 소리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받쳐들지 않은 수인의 머리 위 하늘을 가득 메운 검녹색의 나뭇잎들 사이로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비. 비다. 수인은 악수라도 청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손바닥을 가슴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다시 이마 위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흘러내렸다. 그리고 또 한방울. 그리곤 지체없이 지면 위 모든 것들과 부딪히며 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맹금류의 새 한마리가 수직 상승을 위해 길고 넓은 날개를 펼쳐 날갯짓을 하는 것과 같이 운무가 눈 앞에서 피어올랐다. 저 먼 곳에서부터 죄어오듯 녹음이 서서히 짙어지고 나뭇잎들이 찰랑댔다. 지면은 짙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축축하게 젖은 보이찻잎의 향이 폐부까지 스며들었다. 수인은 발걸음을 재촉하지 못했다. 뿌리박은 나무처럼 우뚝 섰다. 산중 어디로도 비를 피할 길이 없어보였다. 숲 전체가 꿈틀거리며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눈 앞의 모든 것이 생동하며 성장중이었다. 오후 소나기 소식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챙기지 않았느냐고 핀잔을 주던 수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방 사라졌다.
삽입된 사진은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로 특정 기간 한 지역에 머물며 오가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삽입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