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우지간

중편소설 - 대자연 ⑬

by 수빈조

매봉산 산책길에 올랐다 돌아온 수인은 다음날 정오까지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서울서 돌아온 미진의 기척에 묵직한 눈꺼풀을 지그시 떠 일순간 그녀를 맞이했을 뿐이었다. 미진의 얼굴이 아득히 멀어지고 이내 주위가 고요와 평화 속에 잠겼다. 대체로 꿈결과 같이 희미하기만 한데 어떤 순간만은 또렷한 심상으로 기억에 남았다. 커튼색과 같은 붉은 색으로 방 안쪽을 흐릿하게 밝힌 가로등 불빛이라던지 또는 머리맡에 기대어 놓은 냉찜질팩과 테이블 위 뚜껑 덮힌 머그컵 같은 것들이 정막과 어둠 속에서도 예민한 촉수에 걸려 의식의 저 구석 어딘가에 남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은 정신을 차리고서 한동안 정말로 미진이 돌아온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땀에 흠뻑 젖어 방문을 열었을 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화창한 하늘빛을 그대로 받아 앉은 미진의 얼굴을 보고서도 여전히 꿈 속을 헤매이고 있는 것일까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다가 눈 앞이 아득해져 눈을 감고 섰는데 미진이 심상하게 말을 걸어왔다. 밥먹자. 아니 죽먹자.


“응. 나 배고파”


미진이 간단히 상을 차리는 동안 젖은 몸을 씻어내고 나온 수인이 그녀가 아침 겸 점심식사상으로 차려놓았다는 2인용 식탁 위를 의자를 빼내며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팥칼국수네”


온몸에 엉겨 붙던 외할머니의 시골집 아랫목의 모포처럼 되직해보이는 거무죽죽한 팥죽이 목기그릇에 가득 담겨있었다. 팥죽은 적당히 식어보였다. 부서지듯 해변으로 밀려들어오는 성난 파도처럼 수면 위로 솟은 칼국수면이 가지런히 담긴 것과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마냥 초콜릿색으로 물든 새알심이 동동 떠있는 것까지 팥죽은 인원수에 맞춘듯 두 그릇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박무가 들어간 동치미와 멸치볶음, 쫑쫑 썬 배추김치가 찬으로 곁들여졌고 수북히 쌓인 백설탕 더미 위 티스푼이 무심히 꽂힌 항아리 모양의 설탕그릇이 나눠놓은 죽그릇 사이에 함께 놓였다.


“여기선 팥죽. 국수가 안 넘어갈 것 같으면 새알심 넌 놈으로 먹던지. 여그선 팥죽이랑 동지죽이랑 섞어 먹기도 하고”

“나 좋아해 단팥죽”

“설탕 더 쳐 먹어봐. 기운 날그야. 기운 없을 땐 단 거 만한 게 없지”


단팥죽은 구정 무렵 엄마가 액땜 하라고 종종 만들어주던 음식이었다. 미진의 것과 다른 점이라면 엄마의 단팥죽엔 오래 불린 찹쌀이 갈리지 않은 채로 들어가 죽의 표면이 우둘투둘하게 보였다. 밥알은 형태만 있을 뿐 되직한 죽처럼 씹히는 것 없이 목구멍으로 쑥 넘어갔는데 수인은 두어 숟가락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두살터울의 언니는 일부러 식혀서 푸딩처럼 퍼먹곤 했다.


“근데 왜 죽이야? 팥칼국수 아니고?”

“곡물을 갈아만든거니까?”

“아..”


미진의 답변이 납득이 되어서라기보다 아무렴 어떤가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닌데 하고 태세전환을 하느라 수인은 풀죽은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수인은 한숨과 같은 외마디 말을 내뱉고 옻칠이 된 나무숟가락으로 면을 피해 그릇의 안쪽 가장자리 부분에서 팥죽을 조심히 떠 입에 넣었다. 텁텁하기도 하고 씁쓸한 것 같기도 한 그러나 거센 고소한 맛이 묵직하게 혀를 누르다가 맛의 끝에선 뭉근한 단 맛이 여운처럼 입 안에 남았다. 수인은 쑤어먹는 팥 그 특유의 맛을 딱히 선호하지 않았지만 기력이 달린다 싶을 때 엄마의 단팥죽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그러고나면 이상하게 입 안 가득 군침이 돌며 마지막 한걸음을 내딛을 힘이 불끈 솟는 것도 같기도 했다.


“저녁은 좀 이르게 먹자"

“이제 아침 먹는데 벌써 저녁 걱정이야?”

“저녁이 다 뭐여. 매끼 철저한 계획 속에 움직여야 한다고. 먹을 게 얼매나 많은데. 여기 맛의 고장이다”


미진이 목기그릇의 동지죽을 뜨다 말고 세상물정도 모르고 앉아있는 앞 사람을 딱히 여기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말하는 미진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여 피식 하고 실소가 새어나오다가 멈칫 했는데 그러고보니 미진을 만난 이후 들은 말 중 가장 단호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나와바리에 온 이상 이곳의 룰에 따르라는 주인장의 엄중한 공지. 여행 삼일차 되던 날 아침과 점심을 겸하는 식사자리에서 나온 첫 공지였다. 수인은 왜인지 안도감이 들었다. 수인은 주인장 보란 듯 젓가락을 들어 팥죽에 담긴 면을 좌우로 흔들어 풀어내다가 잡히는대로 대충 집어올려 후루룩 빨아올리는 듯 하다가 한 입 베어 먹었다. 면을 타고 자주빛 국물이 녹진하게 흘러내렸다.

“꼭꼭 씹어 먹어”


미진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흐뭇하게 말했다. 그러나 밀가루 제형의 건더기는 씹어먹을 것도 없이 후루룩 수인의 목구멍 속으로 부서져 흘러내렸다. 오물거리던 행위를 멈춘 수인은 입을 앙다물고 입주변에 달라붙은 팥국물을 혓바닥으로 핥아먹었다. 오랜만에 입맛이 돌았다.


“근데 언니. 엄마가 해주던 것보다 맛있어. 원재료가 좋아서 그런가. 맛이 부드럽네”

“원재료? 뭐 팥? 팥이야 서울이나 여그나 다 거그서 거기지. 설탕을 많이 넣어서 그래”

“설탕?”

“그게 달아지는 게 아니라 텁텁함이 사라지고 꼬순 맛이 더 살아"


백설탕이 가득 쌓여있는 옹기그릇을 수인은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맛의 고장이라고 떵떵댈 땐 언제고 팥죽 맛의 비결이 고작 설탕이라고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며.


“그래서 저녁엔 뭘 먹는다고?”


여전히 설탕그릇에 눈길을 둔 채 칼국수면을 목기그릇 안쪽 벽에 붙여 숟가락으로 잘래 내며 수인이 물었다.

“나 아는 언니네 내우지간이 허는 집이고”

“내우지간?”

“부부사이. 여그선 내우지간이라고들 허지”

“내우지간… 내우지간..”


식당이 아닌 집이라는 피수식어 덕에 수인은 앞으로 있을 저녁밥상이 벌써부터 정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를 수식하는 관용어인 내우지간이라는 네음절의 낯선 한자어에 더 오래 머물렀는데, 그 뜻을 제멋대로 해석해보느라 그런 것이었다. 속을 나누는 친구 사이쯤일거라고.


“하여간 아침에 시장에서 떼오는 걸로 쥔장 맘대로 내주는 생선요리집 같은 곳인데”

“이모카세 같은 거네”

“외지서 손님오면 세번째 안에 꼭 데불고 가는 집이여”

“손님….. 아 맞다 언니! 나 요 며칠 신기한 일 되게 많았어”


수인이 팥죽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수인의 머릿 속에 이곳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소녀와 기차역에서 나물을 다듬던 할머니, 역 앞 우주인 모형과 아랫집 이웃, 정어리쌈밥집에서 본 두 남녀 그리고 녹음이 짙게 물들던 비내리는 숲과 숲의 가운데 하늘을 빼곡하게 가리고 선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던 빗방울까지는 피하지 못하고 선 자신까지 마음처럼 되지 않던 여행 중 몇 개의 장면들이 한달음에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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