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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Feb 08. 2024

피진정인

소설 <PART - two> # 공동행동 ③

랄라는 생수를 연달아 들이켰다. 손으로 만지작 거린 탓인지 생수는 미적지근했다. 입안 만 축일 뿐 목에서 느껴지는 뻑뻑한 갈증은 쉬이 해소되지 않았다. 생수병의 올록볼록한 표면을 엄지 손가락 손톱 끝으로 긁어대다가 문득 랄라는 시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생수가 아니란 걸 알고 생수병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진상조사위원 2’ 라는 쓰여진 팻말을 앞에 두고 말하는 사람이 S시립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과정 중인 연구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가 피진정인 C라고 지칭되는 센터장 C가 작성한 답변 내용 중 몇 가지를 언급하는 사이 랄라는 이 이후의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과거를 복기해 가까운 미래를 예단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일 없던 곳으로 랄라는 이 모든 과정이 돌아가는 일이 아니고 피할 수 없이 뒤얽힌 문제들에 맞닥들이고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하며 부패하는 것이 아니라 알맞게 분해되는 일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무참히도 결과는 꽤 그리고 대체로 파괴적인 양상을 띄었다. 이런 일로 조직이 해체되는 경우도 보았고 이 바닥에서 영영 사라진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 일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 몸이 오슬오슬 거렸다. 그나마 지금의 이 구질한 과정을 잠시 벗어나기 위한 방도로 파괴적 결과를 상상해보는 일은 꽤 효과적이었다. 랄라의 손이 움찔했고 생각 외로 얇은 생수병 표면이 살짝 구겨지며 파열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오직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몸만 탐내는.. 뭐 어린 학생들이 벌이는? 대학 캠퍼스 내 그렇고 그런 성폭력 사건처럼 다뤄지는 것 같다… 제가 제대로 들은 건가요?” 


“성적 욕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모럴센스 마저 마비돼 벌어지는 대학 캠퍼스 내 그렇고 그런 성폭력 사건처럼. 입니다”  


랄라는 오른손으로 니트가디건 앞자락을 여미며 허공에 대고 무표정을 연기하며 물었고 진상조사위원 2가 화답했다. 랄라는 센터장 C가 서면으로 굳이 굳이 적어 밝힌 저 문장에 꽤 오래 머물렀다. 생략되었을 단어들을 과감히 복원하며 짐짓 젊잖은 척 꾸며진 그의 문장을 마구 훼손하고 오역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비교선상에 놓일 일 없던 대상까지 끌어와 가장 격렬한 차이로 드러내고자 했던 모럴센스가 그에게 많이 버거워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전면적으로 행위를 부인하는 쪽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못하겠나보지’ 랄라는 진보적 지식인의 이 거추장스러운 체면과 양심이 이럴 때 꽤나 유용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랄라는 한 자락의 허울마저 거둬내고 그의 일그러진 민낯을 직면하는 것이 못내 괴로웠다. 


“누가 그렇게 다뤘다는 건가요? 주어가…”    


‘진상조사위원 2’ 라는 팻말 뒤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며 랄라가 물었다.   


“누구를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 자기 방어 내지는 항변 아닐까요? 또는 진상위 설치와 활동, 그러니까 이 문제가 조직적이고 공식적으로 다뤄질만한 사건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시는 것일수도 있구요.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주위를 둘러보는 ‘진상조사위원 2’에게 ‘4’가 살짝 고개를 들어보이며 저었고 ‘3’은 꼭 이 공간에 없는 사람처럼 말 없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혜옥이 몸을 펴고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랄라가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을 뿐인데 누구도 단정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서 결론을 내버리셔서 좀 놀랐어요. 진정위 활동 자체를 위축시켜버릴 수 있는 상당한 위력이 느껴지는 표현이라는 점 꼭 언급드리고 싶어요. 그것도 센터의 최고결정권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니.. 그리고 행위의 항변을 위해 끌어다쓴 비교형식도, 그 대상도 적절해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의 지성인 대학생들이 들으면 기암할 내용이네요” 


‘심판만 보던 사람, 자신도 도마 위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 랄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개인과 개인 간에 해결 가능한 사건도 아니라고 그 당사자 개인 중 한 명이 판단한 것이고, 조직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결정하기 전 이슈를 살피고 있는 시간인 것이죠 현재의 과정은. 피진정인께서 진정인을 자신과 동등한 당사자로 보지 않는 것 같은 발언 같아 당혹스럽네요. 또, 과도하게 일을 키운 것처럼 그 책임을 진정인에게 떠넘기려는 것 같아서 듣기가 좀 곤란합니다. 조직적 문제 해결 방식까지 온 데에는 본인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걸 자각 하셔야할 것 같아요. 개인간 해결이 어려워 한 쪽이 이 문제를 조직적으로 해결해달라 요청을 한 것이니 이 과정 이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서는 본인이 기존에 갖고 계시던 책임범위 만큼 책임을 더 느끼셔야할 분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다니 답답하네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지금 즐거움을 느끼면서 하는 거 아니잖아요. 저는 반대로 몹시 괴롭습니다”      


얇게 떨리던 목소리가 어느 새 단단해져 있었다. 말을 끝내고나서야 랄라는 커진 말소리가 혹시 바깥으로 새어나갔을까봐 걱정이 됐다. 이상하게 이 단지는 공간 마다 입과 눈과 귀가 달려있는 것 같았다. 말이 금방 번졌다. 랄라는 그의 말에 되받아 할 수 있는 한의 확대된 해석을 내놓았다. 어떻게 하여도 그가 질 수 있는 책임의 규모가 그가 벌인 일에 비해 턱없이 적다는 걸 랄라는 알았다.  

   

“진정인은 진정인의 권리에 따라 조직 내부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조직의 절차라는 것이 개인의 기대와 달리 개인의 이해 보다 조직보위를 우선하여 작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알고도 이 조직질서에 따르고 있는 것인데요. 아니 그보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따르는 조직 안팎의 가혹한 평가와 뭇매, 아니 사실 그보다 더 아프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기부정과 싸우고 감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인이 아직은 이 조직의 질서에 따르고 있다는 점 알아주셨으면 좋겠구요. 향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고 때에 따라 공정하지 못한 결과라고 누구라도 비토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선 이 문제가 본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보잘 것 없지 않다는 점 알아주시고 그리고 이 과정에 좀 성실히 임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자리 이전 공동행동 측으로 사전에 전달된 내용은 없었다. 대신 오늘의 대면 이후 추가 의견 자료를 제출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공동행동 네 사람은 회의 참석요구를 받고 이날의 자리에서 언급할 내용을 점검하기보다 누가 참석할지를 두고 더 긴 시간 고심했다. 대리인이 참석하는 것으로 의견을 진즉에 모은 후에도 한참을 고심하다 결국 랄라로 최종 낙점된 데에는 셋 중 제일 경험이 많고 논리적 말하기에 가장 능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인은 덧붙여 이성적인 대리인의 자세로 자신이 회의에 임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걱정했는데 그것이 그녀가 참고인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여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긴 했다. 그렇게 이 자리에 앉은 랄라는 지금 이순간 대리인으로써의 역할에 실패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회의감이 들었다. 격해지지 않고 개인적 감정도 이롭게 쓰고 싶었지만 마지막 케찹을 쥐어짤 때 그런 것처럼 공기와 케찹이 뒤섞여 뜻과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오듯이 모든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안타깝게도 저희가 조사기능만 부여받은 한시적 조직이라 누구에게도 강제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건 다시 한번 참조해주시고요. 다음 내용이 피진정인의 적극적인 반론 내용일 거 같은데. 그 이야기 하기 전에 지금 참고인께서 해주신 말씀에 대하여 혹시 다른 위원분들 중에 덧붙여 말씀하고 싶으신 것 있으실까요? 저는 피진정인께서 자신의 문제 행위에 대한 확대해석을 미연에 막고 문제 자체를 축소하기 위한 포석 정도로 저 문장을 읽었었습니다만, 진정인측에서 느끼시기에 진정위 등 이 체계에 대한 부정 인식이 포함된 것 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아서요..” 


분위기를 끊어내듯 손혜옥이 랄라에 이어 말을 했고 참석자 얼굴을 두루 돌려가며 말을 건냈다. ‘진상조사위원2’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키보드를  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이리저리 눈치를 봤다. 


“제 생각에 이게 이렇게까지 논의할 건가 싶어요. 알려진 분으로 살아오셨고 이번 건으로 그 분이 감당할 몫이 아무래도 있으실 것이고 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파렴치한 사례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 뭐 이 정도의 항변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저희가 누구의 사회적 활동을 전혀 못하게할 목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 없이 자료를 뒤적거리던 ‘진상조사위원 4’라는 명패 뒤에 남자가 말했다. ‘씽’의 이사 중 한 사람이 추천한 회계법인을 운영하는 대표이자 회계사라고 뮬에게 전해들은 사람 같았다. 위원장과 ‘진상조사위원 2’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 쪽으로 랄라는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지금까지 중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고는 가만히 다음 사람들의 말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어 말을 꺼낸 사람은 랄라였다.               


“자기보호와 변호는 해당 사건에 대하여 1인칭 화법으로 과거와 현재진행형으로 말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성적의도가 없었고 친밀감의 표현이었다고 하셨다고요. 그 정도 말하면 되는 것이죠.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의도를 따져물어 문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식, 꼭 독이 든 나무에 과실인 것처럼 얘기할 게 아니라요. 설령 진정인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손 치더라도 엄연하게 문제 발생 선후상 피진정인이 하신 그 성폭행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 있는 피진정인의, 그렇게 추측하고 계시는 불순한 의도는 정당방위쯤으로 봐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제기된 문제가 꼭 범죄성 성폭력 사건처럼, 본래의 형태보다 부풀려져서 다뤄지고 있다고 들리는데, 그건 저희 입장에서는 진상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개인간 다뤄지지 못한 문제를 조직에서 관련자들 이야기 들어보고 우선 조사라도 해보자 정도로 일을 진척시킨 것 뿐인데, 이걸 가지고 꼭 무슨 고소고발이라도 한 것처럼 되려 피진정인께서 호들갑을 떨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럼 이 문제가 어떻게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차라리 대안제시라도 주셨으면 싶기도 하네요. 죄를 따지고 묻는 일은 당연히 법원에서 하는 일이구요. 지금 우리는 이 공동체와 문화 안에서 허용가능한 수준의 행위인지 이 단지 공동체가 만들어진 이후에 처음으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고 향후 이 결과에 따라 공동체의 문화와 암묵적 규율이 정해지는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힘든 과정일테지만 진정인은 피진정인 또한 암묵적으로 합의한 구조 아래 그 체계에 따르고 있는데..  이 체계를 무력화하기 위한 발언을 듣게 되어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지금 조사위원님께서 하신 말도 역시 저에게 그렇습니다. 누가 사회적 활동 못하게 할 의도를 갖고 있나요? 제 어떤 발언과 행동이, 또 지금의 이 문제제기 방식 자체에 대하여 스스로 점검하고 검열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랬다는 건가요? 누가 벌써 결론을 내렸나요? 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입니까? 여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진정인의 진정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는 발언입니다. 저는 되려 그 말씀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느껴지는데요”     


이번엔 꽤 긴 침묵이 흘렀다. 랄라는 갈증을 느끼지 않았다. 


“아 그리고 반주가 있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통용될 수 있을 법한 친밀감의 표현이라고 하셨다고요? 일하는 관계에서 친밀감을 서로 교환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고 전 아주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근데 그 친밀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건가요? 이성애자인 이성의 직장상사라면 더더욱. 아니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여자들이랑 일을 하네마네 하는데 손을 잡고 어깨를 만지고 포옹을 시도 해야 상대가 그 마음을 알아주나요? 진정인이 강아지는 아니잖아요?” 


고개를 살짝 숙인 손혜옥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랄라는 말하고 난 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열 두개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생수병은 랄라의 오른발 아래 바닥에 반쯤 남겨진 채로 놓여져있었다. 두 팔꿈치를 팔걸이에 두고 모아진 두 손은 랄라의 무릎 위에 놓여졌다. 다만 앞으로 기울여 서있던 허리를 등받이 안으로 깊이 기대어 앉았다. 랄라의 몸이 푹하고 꺼졌다.   


커버사진: UnsplashSalah Ait Mokhtar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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