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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Feb 29. 2024

호시절

소설 <PART-two> #무력 ①

그날 집엔 아무도 없었다. 민정의 뒤에서 알루미늄 샷시 현관문이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찰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민정은 현관문의 록키 손잡이를 잡고 한참 우두커니 섰다. 잠금쇠를 눌러 문을 여는 것도 잠금쇠를 놓아 닫는 것도 그렇다고 손잡이에 의지해 선 것도 아닌 모습이었다. 민정은 그저 가만히 서있기로 했다. 알루미늄 합금 재질의 손잡이는 따뜻했다. 샷시문을 통과해 민정의 등 뒤를 따뜻하게 덥혀주던 늦은 오후의 볕이 마지막 불씨를 불태우듯 꽈릿빛의 비틀린 마름모 모양으로 마룻바닥 위를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옆으로 검은 민정의 커다란 그림자가 비스듬히 놓였다. 집 안의 누군가가 현관에 들어선 민정을 반겨 맞을 수 있었더라면 바닥에 비스듬히 찍힌 그림자의 빛깔처럼 그늘진 민정의 동그란 얼굴을 보고 어느 때와 다르다는 걸 감지했을 것이었다. 투과된 빛에 더욱 또렷해진 집먼지가 중력에 부양하듯 공중에서 빤짝거렸다. 민정은 거실 어딘가에 생긴 블랙홀 같은 구멍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집먼지 무리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시간은 가차없이 여기에서 저쪽으로 흘렀다. 멈춰있는 건 민정과 민정의 그림자 뿐이었다. 현관문 밖 골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째깍. 째깍. 째깍. 원심을 향해 운동 중인 초침소리가 적막 속에서 서둘러가라고 재촉했다. 정직하고 고요한 오후였다.


민정은 여전히 가만히 선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다만 하얀색 원형 프레임 위에서 긴 직각 모양의 초침 바늘이 거수 경례하는 군인처럼 힘주어 움직이고 있을 거였다. 시계의 프레임을 감싸는 뻔떡거리던 유광의 스틸 테두리는 좀처럼 빛이 발하지 않았다. 이 집 거실에 안 맞게 커다란 이 벽시계는 민정의 아빠가 11년전 어느 협력 업체에서 받아온 것이었다. 하얀 원판의 아래 부분에는 오금상사라는 한자가 검은색 궁서체로 인쇄되어 있다. 부모님은 좀처럼 무얼 버리지 못했고, 고등학생이 된 민정은 아직까지도 그 한자를 읽지 못했다. 민정의 아빠는 인쇄용지를 기업체에 납품하던 사업을 하다 어느 제철소에 대한 특별조사가 있던 시절 폭풍같이 세금을 두들겨 맞은 후 사업을 접었다. 폐업 후 채 1년이 안돼 아빠는 이민 가는 친구의 사업을 운좋게 이어받아 동네 은행과 병원 등의 유니폼 세탁을 주 고정 소득으로 하는 세탁 사업을 시작했다. 그 덕에 가정 형편은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맘때부터 엄마는 자주 집을 비웠다. 그 무렵 그녀는 아빠의 세탁소에서 재봉틀로 정성껏 눌러박은 이름표를 유니폼에 달아주는 일을 주업무로, 아빠를 도와 세탁물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부업무로 아빠일을 도왔다. 수선 의뢰가 늘어나자 세탁소엔 엄마의 구역이 생겼다. 민정은 먼 훗날이 되어서야 부모님들이 무슨 수완으로 그렇게 사업을 벌이고 오빠와 자신을 먹이고 입혀서 대학까지 보냈는지 돌아보며 신기해했다. 그 시절의 엄마는 민정이 본 중 가장 즐거워보였지만 그녀의 바람처럼 그 호시절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이 공동사업체 매출은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 아빠의 고객사들이 이 알짜배기 일감을 이해관계에 얽힌 다른 고객에게 야금야금 넘겼기 때문이었다.  


민정은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가 없는 집이 매번 생경했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다행으로 여겼다. 엄마는 학교에서 돌아와 선 민정의 그늘진 표정을 보지 못했다. 민정은 손잡이에서 오른손을 뗐다. 왼손으로 왼쪽 어깨에 삐딱하게 매고 있던 가방을 풀어 마룻바닥 위에 올려놓고 신발장 옆면에 기대어 세웠다. 뻣뻣한 교복조끼의 등부분에 오후 볕의 온기가 느껴졌다. 양 손은 모두 따뜻했다. 민정은 두 뒤꿈치를 위아래로 비비며 한 짝씩 차례로 신발을 벗었다. 내려다보니 흰 양말을 신은 두 발 사이로 검은색 로퍼가 가지런히 놓였다. 민정은 이 검정 로퍼가 꼭 고문기구 같았다. 싸구려 애나멜 재질의 검정색 로퍼였다. 겨울이면 애리도록 발가락이 시리고 여름이면 양말이 흠뻑 젖도록 땀이 찼다. 발바닥에 쥐가 나도록 바닥은 딱딱했고 로퍼의 내피는 신축성도 없어 뒤꿈치를 파고들고 새끼발가락이 약지 아래로 숨어들도록 전족부를 꼭 죄었다. 민정은 언제나 해방되는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로퍼를 벗어 던질 자세를 취했다. 마루바닥에 서서 몸 뒤쪽으로 한 짝씩 신발을 털어놓고 민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이면 나가는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진 신발을 신었다. 그러므로 엄마는 이 가지런히 놓인 신발 형태만 보아도 민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챌 것이었다. 민정은 엄마에 대한 이 생각이 무슨 소용인가 싶으면서도 오른발 상면부를 이용해 로퍼 한 짝을 뒤쪽 방향으로 톡하고 밀어버렸다. 로퍼의 뒷부분이 위로 솟구치며 날아갔다. 나머지 한짝은 아까와 다른 발로 툭하고 옆으로 밀었다.


두 발을 마룻바닥으로 옮겨 드디어 집 안으로 들어서며 민정은 거실과 부엌 사이를 가로질러 먼지들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화장실 문 앞에선 민정은 검지손가락 길이만큼 안쪽으로 열린 나무문을 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밀어냈다. 꽉 끼어있던 문에서 틈이 벌어지며 쩌억하고 소리가 났다. 썩어 갈라진 나무문의 아랫부분이 덜덜 거렸다. 삐익거리며 문이 열리고 먼지가 올마다 알알이 낀 스타킹 신은 다리로 아까와 다른 찬기운이 끼쳤다. 이 화장실 문이 꼭 다른 세계로 가는 길목 같았지만 민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민정은 구멍이 숭숭 뚫린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저벅저벅 걸어가 치마단 양끝을 다리 사이로 구겨넣으며 세탁기 옆에 달린 수도꼭지 앞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수도꼭지 물을 트니 쇳소리를 내며 고무호스로 급하게 내려오는 물줄기가 보였다. 이 집에서 수압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민정은 엄마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여기 수도꼭지 아래에서 도시락 그릇이며 숟가락포크 등을 씻곤 했다. 민정은 양 팔을 무릎 위에 얹고는 세수대야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돌돌 말린 호스 가운데 프린트된 코스모스 꽃 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cosmos 라고 쓰여있지 않았으면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을거였다. 해변가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듯 조용히 물이 세수대야에 밀려들었다. 진분홍색 코스모스가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거기는 가을인가보다 가을 좋지 내내 가을이라면 괜찮겠다 라고 민정은 생각했다. 물은 금방 찼다. 민정은 수도꼭지를 돌려 닫았다. 끼익하고 힘겹게 물구멍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일렁임 없이 수면이 잔잔해지기를 민정은 조용히 기다렸다. 수면은 금새 잔잔해졌다. 지름 35센치의 이 작은 세계는 모든 것이 빨랐다. 민정은 양 팔을 풀어 양손으로 세수대야의 양 둘레를 대칭되게 잡았다. 숨을 깊이 들여마시다가 민정은 우수워졌다. 가슴 깊이 들이마신 숨을 도로 내뱉었다.


“나쁜년”


민정은 세수대야 안으로 얼굴을 쳐박았다.


커버사진: UnsplashAlex Azabache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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