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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Feb 26. 2024

흑과 백  

소설 <PART - two> #공동행동 ⑧

“센터장이랑 뭔 일 있었냐? 대충 들었어 자세한 내용은 아니고..”

“그냥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지? 그건 잘 한거야”

“공기관에서 일하면서 그 정도 직업윤리는 있어야지”


실장 P가 원래도 이렇게까지 하대해왔던 것인지에 대하여 민지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며 둘이 이렇게까지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뒷풀이 자리에서 조차 서로는 서로에게 무의미한 존재였다고 민지는 기억했다. 민지에 증언에 따르면 아무리 기억하려 애를 써도 기억해내지 못할 그런 쓸데없는 말을 섞어 했던 사이였다. 그러나 저 말을 듣는 순간만큼 민지는 그 오랜 사회생활 동안 자신이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선배가 한 명도 없음에 서러워졌고, 이대로 선배P에게 의지해 조직생활을 견뎌내볼까 하는 나약한 생각을 했다. 대학교, 대학원 통틀어도 봐도 그랬다. 여자선배들은 왜인지 자신에게 더 가혹한 것 같았다. 몸에서 냉기가 스물스물 새어나왔다. 자신에게만 유독 더 곁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여자선배들은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늘 어려웠던데 반해 선배 P의 이 하대가 이날따라 부당하고 어색하기 보다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문제의 사건이 있은 후 센터장이 자신에게 갑자기 격을 두자 둘 셋씩 무리지은 군중 속에 홀로 방어막 없이 서있는 느낌이 들었달까 대략 민지의 설명은 그러했다. 민지는 눈 딱 감고 그냥 넘어갈까도 진지하게 그리고 긴 시간 생각했다고. 그러나 몇 번을 되집어 말해 봐도 직업윤리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지 않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직업윤리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였다고 말했다. 그녀가 모든 걸 덮고 넘어가지 못한 가장 결정적 이유는 사실 실장 P의 저 단어였다. 직업윤리.


민지는 자신이 왜 문제를 덮지 못했는지에 대하여 공동행동 구성원들에게 성실하게 설명할 때 센터장 C가 아니라 실장 P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그리고 민지는 직업윤리가 뭐야? 뭔지 알아요? 하고 몇 번이고 다른 세 사람에게 묻고 또 물었다. 이들 중 똑부러진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나인은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에 곤욕스러워 하지 않았다. 대신 “횡령, 배임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하는 말 아니야?” 라고 말하며 사람들 반응을 살피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재차 확인 요청을 했다. 이에 랄라는 “아니 직업윤리라는 말 자체가 너무 이상해” 라고 화답했는데 이상하게 이 말에 공동행동의 네 사람 모두는 명쾌한 기분이 되었다. 진척이 없던 진정서 작성은 그렇게 속도를 냈다.  

          

“피진정인 이가 진정인에게 직업윤리 운운한 것이 조직을 위하여 문제를 덮어준 것에 대한 치하였다고 보신다는 거지요?


랄라는 이입되어 버린 감정과 객관과 공정이라는 허울을 둘러쓴 그러나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엇에 홀려 자기 고백하듯 말을 끝내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말하고 나서 오랜만에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랄라는 직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막 끝낸 말인데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정조사위원 2’가 되묻는 말에 자신이 실장 P가 민지에게 언급했다는 직업윤리에 대하여 발언중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랄라는 어느 새 손에 쥐고 있는 생수병을 들어 마지막 남은 물 한모금을 두 번에 나눠 마셨다. 꿀꺽하고 후두부를 내려가는 소리가 귀까지 울렸다. 그보다 시끄럽게 빈 생수병 표면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랄라는 혹여나 자신이 긴장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조바심이 났다. 말하고 나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자기 확신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쉬웠다. 오랜 진술로 목에 무리가 오거나 갈증을 느낀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실제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그에 앞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꾸미고 싶었다. 랄라는 주먹 쥔 손을 입 앞에 띄어 대고 흠흠 하고 목에 힘을 주어 소리를 냈다. 배에도 살짝 힘이 들어갔다 풀렸다. 곧바로 손을 풀어 엄지와 검지로 목울대를 살짝 쥐었다 폈다 하는 시늉을 했다.


“저희가 사탕이라도 준비해둘 걸 그랬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좀 빨리 진행해볼까요?”


김지희가 랄라를 살피다 진정조사위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랄라는 자신의 의도가 상대에게 전달된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진정인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 같자 표나게 업무편의를 봐준다거나.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외부미팅 갔다고 해줄게. 힘들면 오후에 반차를 써. 뭐 이런 것이요. 자신의 공적 권한을 이용해 편의를 봐주면서 문제를 덮어주는 거. 별다른 조치 없이 넘어갈 경우 조직생활에서 받게될 이익같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봐요. 실제 진정인은 문제를 덮고 갈까 오래 고민하죠. 그러므로 두번째 피진정인의 말과 행동 자체가 진정인에게 다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피진정인 이는 피진정인 일의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해요. 진정인이 몇가지 정황만으로 일,이가 공모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라고요. 본인은 오로지 조직에 더 유리한 방향이 무엇일지 고민해 취한 악의 없는, 선의에 기인한 행동이라고도 밝혔네요”  


손혜옥이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는 피진정인 2의 말을 읊듯이 문서를 보며 말했다. 랄라는 문서를 읽느라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서 두번째 피진정인에 대한 환멸의 표정을 읽어내려는 부질 없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든 손혜옥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진정인 일과 이가 적극적으로 공모한 것이 아니래도 센터장의 진정인에 대한 업무 배제가 있었고 그 뒤 피진정인 일과 이 둘 사이에 진정인과의 사건에 대한 대화가 오간 것을 피진정인 이도 부인하진 않았으니 전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진정인이 꽤 큰 압박을 느꼈을거라고 봅니다. 거기다 피진정인 이는 진정인을 따로 불러내 같은 정당에서 활동하는 사적 관계에서 충고하듯 관련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게 꼭 사적인 메시지로 위장하려 한 것 같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공과 사로 가용가능한 관계를 전방위로 활용해 진정인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전 이것도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봐요. 그리고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피진정인 일이 자신을 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랄라는 손에 쥔 빈 생수병을 양 손 반대로 비틀었다. 회의실 안팎의 모든 일상 소음이 일거에 소거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생수병은 쉽게 구겨졌다. 랄라는 고개를 숙여 구겨진 생수병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곤 오른다리 옆으로 손을 뻗어 구겨진 생수병의 옆면이 바닥에 닿도록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의.. 언제는 누군가의 저의를 문제 삼으시더니 지금은 본인의 선의에 대하여 알아봐 달라고 하시는군요. 타인의 본심은 모두 악하고 자신의 본심만이 선이라고 말씀하시는걸까요? 우리가 토론하며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대한 문제이고 공동체의 질서에 따라 옳고그름이 가려지는 것이니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본인 밖에 알 수 없는 숨겨진 마음 따위에 관심이 없습니다. 피진정인은 진정인 보다 직급이 높은 상사고 언제든 권한을 가지고 편의든 불의든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설사 본인은 선의라 할지라도 타인은 그것을 선의로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인지하셔야할 것 같아요. 더더군다나 그 선의라는 것이 합의되지 않은, 개인의 판단에 따른 조직을 위한 선의였고 결국 그것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잖아요. 그게 타인에 대하여 너무 무감각한 발언이라서.. 조직을 위한 선의라니.. 그럼 문제가 덮어지나요? 그 개인은 이미 피해를 입은 사람이고 그 선의라는 것이 특히 그 사람에게는 대단히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도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은 합리적인 사람이고, 선의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믿음이 너무 강한 사람에게 저는 경외보다 사회적 감각이 결여된 사람으로 느껴지는데.. 제가 예민한 건가요?”


랄라는 두 팔을 가슴에 엑스자로 얹고 손으로 반대쪽 양팔을 꼭 쥐고는 몸을 떠는 시늉을 했고 무심하게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고동색 샤시가 손가락 두마디만큼 열려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누구도 창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열린 창문에서 11월의 찬공기가 훅 하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게 느껴지던 바깥공기가 그 순간 차가웁게 느껴졌다.         


“사법기관이나 인권위 등 외부기관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기 앞서 1차적으로 저희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성숙해지기를 바라며 조직 내부적 차원의 문제해결을 요청드렸습니다. 저희가 속한 공동체가 그 어느 곳보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차별, 편견, 혐오에 맞서는 평화적 저항을 지향하는 곳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구요.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문제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어떤 공동체 시스템보다 더욱, 폭력에 가차 없는 완고한 기준에 따라 엄정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아직 유효하고 피진정인의 진술내용을 고려하되 이 공동체가 성숙해나가는 방향으로 잘 판단해주시리라..”  


랄라는 시선을 창 밖에 둔 채로 말을 했다. 그리고 랄라는 창 밖 시커먼 물체를 발견하곤 말문이 막힌 것처럼 말을 멈췄다. 나뭇잎 그늘 속의 그 물체는 표면에 반사되는 빛도 없는 순도 높은 시커먼 색을 하고 있었다. 랄라는 이토록 시커먼 검은색을 본 적이 있는지 짧게 고민했다. 그리고는 지옥에 떨어지면 저 검은 새가 떼지어 모여들어 힘차게 몸의 구석구석을 뜯어 먹는 상상을 했다. 살점이 뜯기고 짙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보다 큰 살점 덩어리 하나를 부리에 물고는 땅을 박차고 올라 힘차게 날개짓 하는 까마귀 한마리를 상상했다. 랄라는 이 불온한 생각 때문인지 새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차게 느껴지기 시작한 바깥공기 때문인지 원인을 모르고 몸을 부르르하고 떨었다. 그 때 그 검은 물체가 날개를 늘어뜨리고 머리를 흔들며 까악 소리를 냈다. 모두는 일제히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상조사위원 2’가 창으로 다가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창문을 닫았다. 랄라는 시선은 창 밖을 고정한 채 그제야 아무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믿습니다" 라는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커버사진: UnsplashRoman Kraft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2부(two)에 속하는 것입니다.

☞ 소설 <PART - one>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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