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퇴사9] 우리 모두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남편은 자신도 힘들다고 했다. 회사 일이 많은 건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야근하고 싶어서 야근하는 게 아니라고. 자신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육아에 참여하고 있는데 회사에서는 회사대로 눈치가 보이고, 집에서는 늘 내 원망을 들어야 하고. 중간에 끼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은 나랑 사는 게 때로는 가혹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회사에 있는 다른 남편들은 육아는 아내에게 맡긴 채 일하고 골프 치며 사는데 그에 비하면 자신은 훨씬 나은 것 아니냐고. 왜 칭찬해주지 않고 늘 비난만 하느냐고. 그때 나는 말했다.
“회사에 있는 다른 남자들이랑 비교 말고, 바로 옆에 있는 나랑 너를 비교해봐. 나도 너처럼 정말 마음껏 일해보고 싶어. 회사에 눈치가 보인다고? 나는 당장 내일도 출근할 수 있을지 불확실해. 애 때문에 급하게 휴가 내고 재택근무 신청할 때마다 얼마나 눈치 보는 줄 알아? 애 낳고 나서 내 경력은 단절돼버렸어. 그런데 너는 애 낳기 전이랑 다를 것 없이 일하잖아. 대체 누가 가혹한 거야?”
애너벨 크랩이 쓴 책 <아내가뭄>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이를 낳기 전과 후 일하는 시간에 거의 변화가 없다. 심지어 아이를 낳기 전보다 더 많이 일한다. 왜냐고? 그들에게는 무급으로 애보고 집안일 해줄 아내가 있으니까.
반면 아내가 없어 ‘아내가뭄’ 현상에 시달리는 아내들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대안을 찾아 나선다. 탄력 근무, 시간제 근무를 하거나 아니면 일을 아예 그만 두거나.
“그러나 아이가 생기면 양상이 달라진다. 남자의 직장 생활은 덜컹거릴지언정 멈추지 않는 반면, 여자들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에 맞춰서 노동 형태를 바꾸는 데 훨씬 유연하다. 남자는 경기 침체 때문에 일자리에 지장을 받지만 여자는 가족 때문에 지장을 받는다.” -애너벨 크랩, <아내 가뭄> p.180
아내 가뭄이 심해질수록 일터에서 여성의 경쟁력은 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는 아이가 있든 없든 자신을 100% 갈아 넣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일꾼을 원한다. 아내가 있는 수많은 남편들이 바로 그 이상적 노동자다. 우리 남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아이는 함께 낳았는데 탄력근무를 택하는 건 왜 대부분 여성일까. 육아휴직 복귀 후 나는 8시-5시 유연근무를 했다. 상황에 따라 재택근무를 했고 퇴사 직전에는 진지하게 4시간/6시간 시간제 근무를 고민하기도 했다. 반면 남편에게는 계속 회사를 다니거나 퇴사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물론 회사 문화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2천 명 규모의 대기업이었지만 육아휴직을 쓰는 남자 직원은 찾기 어려웠다. 반면 나는 진보적 성향의 언론사에 다니고 있었고 남자 직원도 비교적 자유롭게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회사에서도 육아 때문에 근무 형태를 조정하는 경우는 여성이 월등히 많았다. 이는 여성과 남성에게 육아를 둘러싼 사회적 기대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이 때문에 탄력근무 하는 건 용인되지만 아빠가 육아 때문에 탄력근무를 요구하면 이런 말이 돌아올 것이다. “애 엄마는 뭐 하고?”
<아내가뭄>에는 매우 웃픈 실험결과가 나온다. 2013년 캐나다에서 중산층 노동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실시했는데 아이를 돌보는 남성들은 아이에 대해 통상적인 책임만 지는 아버지들보다 직장에서 더 많이 시달림을 당했다. 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육아를 담당하는 남성은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보다도 더 많은 시달렸다고 한다.
남편이 회사에 눈치가 보인다고 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애 때문에 유난 떠는 남자, 와이프에게 잡혀 사는 불쌍한 놈... 남편은 자신이 가부장제의 반역자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그럼 일터에서 가장 많이 들볶임을 당한 여성은 누구였을까. 아이가 있는 여성? 아니다. 아이가 없는 여성이 아이가 있는 여성보다 직장에서 더 많이 시달렸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 취급 받았다. 사회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남성과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분위기 탓에 일터와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의 성 역할은 더욱 고착된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남성의 가정진출은 일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육아와 가사노동은 여성의 몫이다. 그 결과 일하는 여성들은 일터에서는 아내가 있는 남성과 경쟁하고, 가정에서는 완벽한 엄마이자 아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애너벨 크랩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직업이 없는 사람처럼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됐다.
애너벨 크랩은 남성도 이러한 구조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일터에서 지나치게 많은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정작 가정에서는 많은 것을 잃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일터에서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가정과 일터를 연계시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만 패자라고 가정해버리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모두가 패자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여자들, 일터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남자들, 아버지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아이들...” 같은 책, p.58
이 대목이 참 슬펐다. 나는 아이가 매일매일 자라는 순간을 남편과 함께 목격하고 싶다. 막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가 어제는 어떤 말을 했고, 오늘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눈과 몸에 기록하고 싶다. 아이와 함께 호흡하며 아이가 주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
아이 역시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라기를 원한다. 세 식구가 함께 일상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남편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상황에서는 이 모든 게 불가능한 꿈이다.
물론 일도 중요하다. 30대 중반. 나도 남편도 일터에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다가올 40대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이 시간은 아이가 부모의 집중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는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많은 부모가 이런 딜레마 속에서 아빠는 일, 엄마는 육아를 택한다. 일을 계속 하고 싶은 한국 여성들은 친정 엄마을 아내로 두고 살아간다. 엄마가 일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럴수록 아빠는 더욱더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 악순환.
왜 일과 육아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 되어야 하는 걸까. 둘 모두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과 육아의 양립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모두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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