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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Oct 08. 2024

연재가 종료됐습니다

'의미병'이라는 불치병

연재 담당자에게 메일이 왔다. 콘텐츠 리뉴얼로 9월부터 연재를 종료하게 됐다고. 9개월 동안 좋은 글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연재가 끝났구나. 이렇게 갑자기.' 달력에 표시해 놓은 다음 마감일에 엑스자를 쳤다.


연재 제안을 받고 처음(이자 마지막) 미팅을 한 게 지난해 추석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기획안을 전달하고 연재 콘셉트를 확정해서 3주에 한 번 꼬박 15개의 글을 보냈다. 연재 글을 쓸 때마다 3주가 왜 이리 빨리 흘러가는지 시간의 흐름에 화들짝 놀랐다. 애초에 기간을 정해 놓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연재가 끝나니 씁쓸했다. 남편과 밥을 먹으면서 연재에서 ‘잘렸다’라고 말했다.


나 : “내가 별로 안 유명해서거나, 글이 별로거나. 그래서 그런 거겠지?”

남편 : “뭐 그것보다는… 네가 꼭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그런 거겠지?”


아이고 뼈아파라.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쓸모가 있으니까 찾고 쓸모가 없으면 안 찾고. 간단하고 당연한 이치인데도 상처는 상처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게 왜 상처받을 일이야'라고 쿨한 척했겠지만 그렇게까지 나를 괴롭히지는 않기로 한다. 아픈 건 아픈 거다.


쓰린 속을 달래고 있는데 추석 이후부터 시작하기로 했던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취재 일정을 잡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10월은 돼야 업무 논의가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7월 말에 처음 제안이 왔던 프로젝트였는데, 담당자가 ‘작가님과 꼭 작업하고 싶다'라고 말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쯤 되면 그냥 마음을 비우고 있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다. 프리랜서의 일은 계약서를 써야 시작된다는 말을 떠올렸다.


요즘 수집하는 짤들


일감이 없는 건 아니다. 매달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인터뷰 시리즈가 있고, 계약해 놓은 책 원고도 이제는 꼭 써야 한다. 남편은 “책 쓰라고 온 우주가 도와주는 거네"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헛헛하고 쫓기는 듯한 마음이 드는 걸까. 또다시 길을 잃은 느낌(길을 안 잃은 적이 있더냐…).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 상황이 싫으면서도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할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


상반기 내내 일이 많았다. 텍스트 인터뷰뿐만 아니라 영상 인터뷰 구성 작가 일을 처음으로 해봤고 출판 편집을 하기도 했다. 청탁 글도 꾸준히 썼다. 프리랜서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효능감을 느꼈다. 금전적으로도 퇴사 이후 가장 많은 수익을 냈다. 평일 저녁이고 주말이고 없이 계속 일을 하면서 ‘이게 맞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이게 맞나, 이렇게 살려고 했던 게 맞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냥 하자'를 되뇌었다. ‘그냥 하자, 제발 좀 그냥.’ 그러다 내년에도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떠올리면 아득해졌다. 인터뷰 외주가 없어도 나는 인터뷰어일 수 있을까. 그래서 인터뷰 책 원고 진도가 안 나가는지도 모른다. 초고 앞부분만 쓰다 멈춘 게 몇 개인지.


지난주 퐁당퐁당 연휴에는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5박 6일 동안 충청도 논산에서 시작해서 전라도 익산, 남원을 지나 경상도 함안, 의령, 창녕, 고령에 갔다가 다시 충청도로 와서 속리산에 오르는 일정이었다. 마지막 일정에는 날날이를 가족들에게 맡기고 남편과 속리산 문장대까지 올랐다. 법주사부터 문장대까지 왕복 6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로지 걷는 행위에만 몰두하니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여행에서 만난 아름다움

산을 오르면서 남편에게 지난달 만났던 인터뷰이 이야기를 했다. 12년째 매일매일 블로그에 수업 일기를 쓰고 있는 어느 초등교사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고 성장하는 전문가는 없다"라는 선배 교사들의 말을 듣고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는 그는 자신에게 기록은 수업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게끔 만들어주는 장치라고 말했다.


“잘 됐으면 잘된 점을 기억하고 안 됐으면 다음에 어떤 식으로 보완을 했으면 좋겠다고 피드백을 해요. 그럼 수업이 자연스레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물론 이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고 교사들이 지치죠. 그럼 아이들 탓을 하게 되고요. 확실히 기록을 하게 되면 아이들 탓을 덜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준비 잘했는데 아이들이 엉망이다'라고 쓸 수는 없잖아요. 설령 그게 진실이라도 다음번에는 어떻게 해야겠다고 성찰하게 되고 그게 결과로 나타나죠.”  -나승빈 교사와의 인터뷰 중에서


지난해부터 프리랜서로 일하는 동안 ‘돈을 받고 쓰는 글' 이외에는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나중에 정리해서 써야지'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걸 써서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회의도 있었다(이쯤 되면 ‘의미병'은 불치병 같기도ㅎㅎㅎ).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너무 많은데 책을 읽는 사람은 너무 적은 시대에 읽히지도 않을 글을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그저 충실한 감상자로만 남아도 되지 않을까. 인스타그램 피드 하나 남길 때도 온갖 경우의 수를 신경 쓰느라 스트레스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수업 일기를 매일 공개적으로 올린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초등교사는 답했다. 일기 쓰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사로 살았다는 흔적 같은 거라고. ‘교사로 살았다는 흔적'이라는 말이 인터뷰 후에도 계속 맴돌았다.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하면서 말했다.


"내 삶이, 넷플릭스 초기 화면에서 뭐 볼까 고민하면서 스크롤만 내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보고 끝나는 거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실패할까 봐 별로일까 봐 두려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내는 거야. 그 시간에 뭐라도 했다면 뭐라도 남았을 텐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일단 해보는 것들을 늘려가 보려고."


 그러자 남편이 답했다. "등산 같은 거네."


문장대 정상에서


일단 쓰다 보면 뭐라도 쌓여 있지 않을까. 최소한 내가 나로 살았다는 흔적은 남길 수 있겠지.



매일 수업 일기를 쓴 초등교사와의 인터뷰 글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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