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문장이 위로가 될 때

공명(共鳴) : 함께 울림

by 진경



유한한 이 세상에 무한한 수명을 가진 게 있다면, 글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된 노래의 가사, 한 줄의 시구. 소설 속 인물이 잊힌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불려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글쓴이의 시선과 가치관, 이야기가 몇 천 년을 넘어 다시 사랑받을 때, 저자는 그때마다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기록하고, 글을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삶의 지혜가 담긴 편지나 일기는 아니지만, 엄마가 남긴 작은 기록이 있다. 3년 가까이 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첩엔 가장 중요한 것들만 적혀 있다. 내 친구, 동생 친구 몇 명의 연락처. 가족과 친척, 가까운 사람들의 생일과 기념일. 중요한 클라이언트들의 관계.


평범한 기록 같지만 그 짧은 메모엔 엄마의 따뜻함이 묻어있다. 수첩에 적힌 이름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훑으며, 진실되고 한결같은 태도로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던 엄마를 떠올린다. 나도 엄마처럼 넓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는 다짐이 든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은 잠깐 부활한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즈음,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누군가의 애도 에세이를 읽었다. 저자와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음에도 그녀의 글에서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고통과 상실은 아주 개인적인 사건으로 보이지만, 글로 표현되는 순간 보편성을 얻는다. 그 글은 아버지를 잃은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의 경험이 타인의 경험이 되고, 나의 문장이 타인의 마음을 울리는 순간. 그것이 글의 힘이자, 역할이 아닐까.






글은 독자에게만 위로가 되는 게 아니다. 쓰는 이 역시 글쓰기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힘을 얻는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버지니아 울프는 어머니와 언니, 아버지를 모두 잃으며 깊은 신경쇠약에 시달렸지만, 남편의 독려 속에서 글쓰기에 매진하게 된다. 울프는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 자신만을 위해 쓰는 습관이 좋은 훈련이라는 믿음이 있다. 글을 쓰는 습관은 내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고, 나를 유연하게 만든다. 나는 마음속 혼돈을 바로잡기 위해 글을 쓴다.” (Virginia Woolf, A Writer’s Diary)



울프의 글은 고통 속에서도 삶을 붙드는 언어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 사랑받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 자신에게도 글쓰기는 자기 마음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행위였다.


나는 <매일의 작별, 매일의 시작>이라는 연재를 시작하면서 엄마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명확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마음 깊은 곳에 흩어져 있던 편린을 꺼내 마주하며, 7년 동안 상실의 바다에 표류하던 감정을 글로 나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날것의 생각과 단어를 주섬주섬 늘어놓은 사사로운 이야기가 과연 문장이 될 수 있을까 망설였지만, 여러 번의 퇴고 끝에 남은 글들은 결국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어루만졌다.


죽음을 사유하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문장으로 남기며 내 몸과 정신은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 울프가 말했듯, 글쓰기를 통해 산만한 정신을 질서 있게 정리하고 내일을 시작하는 힘을 얻는다. 같은 아픔 속에 있는 사람들이 문장으로 연결돼 서로를 위로하고, 남겨진 이들은 그 문장을 붙들고 또 하루를 살아낸다.


그래서 오늘도, 나의 두려움이자 부끄러움. 나약함을 뒤로하고 문장을 잇는다. 오늘을 지나 내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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