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기술과 규제 그 사이 어딘가에서
기술의 혁신은 어디서 멈출까?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멈추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기술은 더 빠르게, 더 새롭게, 더 편리하게. 세상을 바꾸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문장 속에는 언제나 기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가정이 존재한다.
또한 이에 발맞춰 기술의 속도는 계속 빨라지고 있다. 새로운 서비스가 하루에도 수없이 등장하고, 정책은 그 속도를 쫓느라 늘 뒤처진다. 기업은 혁신을 외치지만, 사회는 그 변화의 방향을 따라잡지 못한다.
이제는 얼마나 빨리 가는가보다 어디로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너무 많은 업데이트를 요구한다.
기계는 끊임없이 새롭게 버전을 바꾸고, 각 국가의 정책은 그 속도를 쫓느라 헐떡인다.
기업은 혁신을 외치고, 정부는 규제를 손질하며, 국민은 그 틈에서 새로운 기준에 적응하느라 하루를 보낸다. 이는 비단 기술에 대한 정책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의 이면에는, 그 변화의 속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늘 함께 있다.
새로운 문물이 나오면 적응을 하여야하고, 식당에서는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지 못하면 원하는 음식을 먹기도 힘들다. 핸드폰도 새로운 폰을 사면 조작법에 적응 하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
연재를 시작하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기술은 멈추지 않는데, 제도는 그렇게 쉽게 멈추는가?
기술은 실험을 통해 발전하지만, 제도는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두 영역의 리듬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혁신의 현장은 늘 ‘조금 더 빠르게’를 외치지만, 사회 전체는 ‘조금 더 안전하게’를 요구한다. 이 간극을 메우는 과정에서 진짜 정책 역량이 드러난다.
싱가포르의 핀테크 규제샌드박스, 미국의 로비스트 제도, 중국의 국가 주도형 혁신 전략, 그리고 한국의 다양한 규제완화 실험들은 모두 이 간극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였다.
각국이 기술은 보는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결국에는 변화를 허용하되 국가의 신뢰를 잃지않고 국민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원하는 점에서는 그 결이 같았다,
우리는 종종 멈춘다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멈춤은 후퇴가 아니라 점검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묻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기술이 악용 될 여지는 없는가?" 등등 말이다.
정책은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진화한다. 멈춤 없이 나아간 혁신은 불안을 낳고, 멈춤만 반복하는 사회는 기회를 잃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멈춤과 나아감의 균형이다.
이 연재의 끝에서 가장 크게 남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제도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기술은 사람의 삶을 바꾸기 위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혁신이 사회에 뿌리내리려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여야 한다. 기업은 책임 있는 혁신을 고민해야 하고,
정부는 규제와 실험의 균형을 설계해야 하며, 시민은 변화의 수용자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세워서 공동 설계자로 나서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대안책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 대기술의 시대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 신뢰다.
기술이 삶을 바꾼다는 것에 이의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의 질(Quality)을 결정하는 것은 제도다.
그리고 그 제도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우리가 멈춰야 할 때는, 방향을 잃었을 때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때는, 신뢰가 회복되었을 때다. 그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기술정책의 진짜 역할이다.
혁신은 속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윽 신뢰의 구조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그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할 때다.
작가의 말
이 글은 《기술의 혁신은 어디서 멈추는가》 연재의 마지막 편입니다. 올해 8월 1화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한 편씩,기술과 사회, 그리고 제도 사이의 관계를기록해왔습니다.
이 시리즈는 제가 박사 전공으로 연구해온 ‘기술정책’이라는 주제를, 현장의 언어로, 현실의 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한 작은 시도였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기술이 삶을 바꾼다면, 제도는 그 방향을 지탱합니다.그리고 그 길을 함께 만드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