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 이야기 #2

거짓말

by Snoopyholic

건물 전체에서 열리는 세 개의 전시를 해치우듯 다 보고 나니 출출함이 느껴졌다.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저녁 메뉴를 라멘으로 정하고 좋아하는 라멘가게가 있는 신주쿠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개찰구를 지나자마자 아차, 싶었다. JR 야마노테 선은 퇴근하는 회사원들로 심하게 북적였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까웠다. 전차가 흔들릴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 휩쓸려 내 몸이 흔들렸고 속도 함께 울렁거렸다.

시부야 역에 이르자 우르르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기에 일단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내린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탔는지 몸에 가해지는 압력의 강도가 아까보다 심해졌다. 이제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되긴 하는데 무사히 내릴 수 있을지 걱정됐다. 나의 고통을 알 리 없는 전차는 신나게 하라주쿠를 지나 신주쿠에 도착. 다행이 하라주쿠에서 많은 사람이 내려준 덕분에 걱정과는 달리 내리기는 수월했다.

개찰구를 향해 통로를 내려오니 전차 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통로를 꽉 매우고 어디론가 흘러갔다. 일정한 숫자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저 머리의 물결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한여름 뜨겁게 덥혀진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거대한 인간의 물결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순간 압도당해 숨이 막혔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얼 생각하며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서울에서도 가끔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다 보면 같은 시간에 같은 곳을 향해가는 같은 표정을 지은 사람들의 물결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숨이 막혀서 쓰러지듯 주저앉곤 했다. 다리에 스르르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이제는 도쿄에서 주저앉게 되는구나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는 느낌이 났다.

“괜찮습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부축해드릴까요?”

“아니에요. 잠시 중심을 잃었을 뿐인걸요.”

“사실은 전차에서부터 쭉 봐왔는데요. 혹시 지금 바쁘게 어디 가시는 겁니까?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차라도 한 잔 어떠세요? 부탁합니다.”

“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머리를 숙인 남자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일본식 헌팅 난파로구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혼자서 먹는 라멘보다야 같이 먹는 라멘이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말을 이었다.

“남을 마음대로 미행하다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제가 경찰에라도 신고하면 어쩌시겠어요?”

“네?”

남자의 눈이 두 배는 커진다.

“하하하, 놀라긴. 농담이에요. 신주쿠에 맛있는 라멘 집 알아요? 제가 지금 되게 배고프거든요.”

“아,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어떤 라멘을 좋아하시는지?”

“깔끔한 맛에서 구수한 맛까지 다 좋아해요. 원래 가는 집이 있긴 한데 역에서 멀어요. 혹시 새로운 곳을 아시나 해서요.”

이렇게 나는 낯선 이국의 남자와 나란히 앉아 라멘을 먹게 됐다. 우리는 맥주도 한 병씩 시켰다. 처음에는 자신을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얼버무리던 그였으나 자꾸 캐물으니 소규모 방송국에서 일하는 피디이며 여행과 사진을 취미로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입은 옷차림이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유롭다 했다.

질문의 화살은 이제 나를 향해 날아왔다. 한꺼번에 날아드는 질문들을 바라보던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망설였다. 문득 아까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장난기가 다시 발동해서 순식간에 상상의 자아를 만들어 그에게 소개했다. 이제 그에게 나란 사람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중인 일본 교포다. 아주 어렸을 때 일본인 생부와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도미, 그곳에서 미국인 양부를 만난 어머니와 정착하게 됐지만 몇 년 전부터 외면만은 할 수 없어서 생부를 만나기 위해 도쿄를 1년에 한 번씩은 방문하고 있다.

국적까지 바꾸다니 너무 대담한 거짓말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뭐 어떤가, 다시 볼 것도 아니고. 그는 철석같이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참 잘도 지어냈다. 이로서 완벽하지 않은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서투른 이유까지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남자가 우리의 대화를 자꾸만 미국 쪽으로 몰아가려고 해서 화제를 바꿨다.

“혹시 츠키지 시장에 사진 찍으러 가본 적 있어요?”

사진이 취미라면 분명 그도 한 번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낮에 보았던 브르노의 사진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어떤 사진이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어떤 물음표들이 나에게 꼬리를 물고 찾아왔는지.

“물론이죠. 새벽에 일어나는 참치 경매는 일본인들에게도 꽤 흥미로운 볼거리죠.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 특별히 더 알려진 것 같기도 하지만요.”

“나도 그 장관을 보고 싶은데 몇 시에 가는 게 가장 좋을까요?”

“적어도 새벽 4시 30분까지는 가야 제대로 된 풍경을 볼 수 있어요. 그 때 막 모든 것이 시작되거든요. 가장 좋은 방법은 밤새도록 근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슬슬 걸어 시장구경을 가는 거죠. 저도 젊었을 때 몇 번 해봤는데 그 광경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확 나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쿄에서 늦은 새벽 시간까지 여자 혼자 어디서 홀로 술을 마시라는 이야기에요? 바보.”

“하하, 그러게요. 정말 바보 같은 조언이었네요. 그럼 좀 더 실질적인 제안을 하나 하죠. 혹시 원한다면 같이 가줄 수 있어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왠지 나도 츠키지 시장에 다시 가고 싶어졌거든요.”

“네?”

“여기 내 전화번호에요. 혼자 심심할 것 같으면 연락해요. 술 마시는 코스로 모시고 싶지만 아무래도 직장인이라서 거기까진 힘들 것 같고 차로 데려가 줄 수는 있어요.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역동적인 삶의 현장에서 사진 찍으면서 자극 받아 치열하게 살아보도록 나를 다잡아보게요.”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계산을 하더니 그 남자가 사라져버렸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는데. 잠시 멍하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정신이 들어 손에 쥐어진 종잇조각을 들여다보았다. 정직한 직사각형으로 잘라진 명함 위에 너무나도 또박또박 정직하게 인쇄된 ‘오가와 케스케’라는 이름이 여태까지 가상의 자아를 만들어 실컷 떠들어댄 내 실제의 자아를 무안하게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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