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문득 마흔 15화

새벽 2시의 슈납스

Prost~

by Snoopy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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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트윈픽스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 봤던 그 외화가 25년 만에 다시 제작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보지 않을 수 없었지만 25년 만에 다시 보려니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아서. 옛날 구닥다리 에피소드들도 다 찾아봤다. 그 여정에는 모친 박여사님도 함께하셨다. 마침내 3시즌에 이르렀지만 역시 지구 반대편에서 60년도 넘게 혹은 40년 동안 그저 그런 삶을 살아온 모녀는 그 심오한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나마 정말 헐리웃에서 이름 난 명배우들이 언제 튀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 하나만으로 에피소드 하나 하나를 시청하는 중(이미 미국에서는 종영됐다)이다. 어쩐 일인지 음주를 지양하시는 박여사님께서 먼저 청하여 막걸리가, 아직도 남아 식탁을 지켜주는 듬직한 김장 김치가, 우리의 시간에 양념을 더해주었고, 자정이 채 되기 전, 그녀는 잠들기로 했다.
아직 잠들고 싶지 않았고 알콜 섭취가 모자랐던 나는 방을 뒤적이다가 십일 년 전에 비엔나 출장에서 가지고 왔던 슈납스 한 병을 발견했다. 그 투명한 액체를 출장 기간 동안 잘도 원샷으로 마셨구나, 생각하며 지금의 나는 십일 년 전의 내가 아님을 상기했다. 즉시 냉장고에서 알맞게 차가워진 우유 한 팩을 방으로 가져와서는 샷 하나의 분량에 적절히 섞었다. 이 밤에 어울리는 음악은 니나 시몬스라며 그 끈적한 목소리를 공기 중에 퍼뜨리고 이미 읽었던 한 작가의 유럽 방랑기를 다시 펼치는 순간 창으로 톡톡 떨어지는 빗소리.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는 갑자기 쇼팽의 녹턴을 하프 연주로 듣고 싶어서 그걸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하지만 자꾸만 내 머리는 십육 년 전 하프를 배웠던 여름날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저 일주일에 하루였지만 커다란, 그리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 곁에 앉아 소리를 내고 있노라면 참 행복했던 기억들......
연주가 9분 만에 끝났음에 아쉬워하며 다시 니나 시몬스의 목소리를 찾았다.
십일 년, 십육 년, 이십오 년.....
이십오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의 두께.
문득 그 두께에 놀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십일 년 전 비엔나에서 하루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호텔 근처에 있던 바로 불쑥 들어가 바텐더에게 그저 ‘슈납스 한 잔 부탁합니다’를 독어로 외치고 그가 건네는 샷을 원샷으로 들이킨 뒤 몸을 부르르 떨었던 것처럼.
그때 출장에서 돌아오던 공항에서 슈납스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작은 병 몇 개를 사서 선물로 하고 나를 위해 한 병 남겨놓았더랬다.
그리고 오늘 밤, 나는 그걸 우유에 희석해서 마신다.
하프 연주와 니나 시몬스의 노래를 들으며 아주 천천히.....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갑자기 쓰고 싶어진 이 글을 작성하면서......
이십오 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채로 방구석에 앉아 슈납스를 우유에 희석시켜 홀짝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겠지.
그건 하프를 키던 십육 년 전의 나도,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비엔나를 활보하던 십일 년 전의 나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누가 자신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점쟁이도 로또 번호는 못 맞춘다잖아.
난 혹시 앞으로 다시 십일 년 뒤에 오늘 밤을 회상하게 될까.
내가 그 세월 동안 간직했던 한 병의 슈납스를 비우게 될 이 밤을.
이 글에 마침표를 찍겠지. 읽던 책의 뒷표지를 덮게 되겠지. 마침내 마지막 단 한 잔은 십일 년 전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들어가던 길 스윽 들어갔던 바에서 그랬듯 단숨에 잔을 비우고 잠들게 되겠지.
딱 40도만큼의 뜨거운 기억들의 느낌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Schlaf g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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